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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전통주

좋은 술 만들면 뭐하나, 팔 수가 없는데

by 아잘 2013. 2. 26.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5603

 

“좋은 술 만들면 뭐하나, 팔 수가 없는데”전통술을 빚다 벽에 부닥친 이들이 ‘우리술 협동조합’으로 뭉쳤다. 함께 모여 유통 구조, 원재료 구매 등 전통술 발전에 걸림돌이었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술 애호가, 유통 전문가 등 5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김은남 기자 |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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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호] 승인 2013.02.21 08: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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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충남 예산에서 나오는 와인이다. 예산에 추사 김정희 생가가 있는 데다 지역 특산품인 가을 사과로 만들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맛과 향이 좋아 와인 애호가 사이에서는 이미 입소문이 났다. 지난해 전통주진흥협회가 주관하는 ‘대한민국 우리술 대축제’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인천공항 면세점에도 입점해 있다.

이 정도면 나름 화려한 스펙이다. 그런데 추사를 만드는 정제민 (주)예산사과와인 대표는 말한다. “자꾸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생각이 든다.” 10년 전 캐나다에서 와인을 공부하고 돌아와 처가가 있는 충남 예산에 자리 잡을 때만 해도 장기전을 각오했던 정씨다. ‘술은 사람이 아니라 세월이 빚는 것.’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한국에도 제대로 된 와이너리(와인 양조장)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유럽 와인 산지를 가보면 대부분 포도밭과 양조장이 분리돼 있지 않다. 농장 한가운데 와인 제조장·시음장이 있어 견학과 체험이 동시에 가능하다. 이를 본떠 정씨도 장인이 운영하던 사과농장 한편에 체험관 겸 양조장을 지었다. 이곳에서 스토리(story)와 히스토리(history)를 차곡차곡 쌓아가며 최고의 와인을 만들리라 다짐했다. 그랬던 그가 시간이 흐를수록 깊은 회의에 빠진 것이다.

ⓒ시사IN 조남진

‘지평막걸리.’ 경기 지역을 대표하는 막걸리 중 하나로 통한다. 1925년 양평군 지평면에서 양조장을 시작했으니 80년 역사를 자랑한다. 특유의 칼칼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으로 기성세대와 신세대 모두에 반응이 좋다. 서울 홍대 앞 막걸리 바의 인기 컬렉션이기도 하다. 지평막걸리의 자부심은 다음의 가훈에 그대로 묻어난다. ‘수익을 기대하지 말 것, 명성에 먹칠하지 말 것, 다른 어떤 것보다 술맛을 최우선으로 할 것.’

전국적인 지명도에 충성도 높은 소비층. 이 정도면 먹고살 걱정은 없을 듯하다. 그럼에도 4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지평막걸리의 젊은 사장 김기환씨(32)는 말한다. “위기감이 크다. 이대로라면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

“좋은 술 만들면 뭐하나, 팔 수가 없는데”

절망하던 이들이 협동조합의 깃발 아래 만났다. 전통술을 빚는 생산자 20여 명이 모여 ‘우리술 협동조합’을 결성한 것이다. 탁주를 비롯해 청주, 과실주, 증류식 소주 등 이들이 생산하는 주종은 다양하다(위 오른쪽 그림 참조).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곳에서 아직 가양주(집에서 빚은 술) 수준인 곳까지 양조장 규모도 제각각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고민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좋은 술 만드는 일은 자신 있다. 그런데 좋은 술 만들면 뭐하나. 팔 수가 없는데….” 일종의 생산자 협동조합이라 할 우리술 협동조합은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시사IN 조남진
정회철 조합장이 숙성실에서 60일 전 담가둔 전통술을 살펴보고 있다.
실제로 유통과 판매는 이들이 가장 힘겨워하는 부분이다. 8조60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는 국내 술 시장에서 전통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4.5%에 불과하다(2008년 기준). 그나마 국순당(백세주)·보해양조(보해복분자)·배상면주가(산사춘) 등 대기업이 시장을 지배한다. 소규모 전통술 생산자는 사실상 시장에 끼어들기 힘든 구조다.

지난해 주세 규정이 바뀌면서 새로운 길이 열리기는 했다. 대기업이 자기네가 만들지 않은 전통주도 유통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대기업에 종속되는 문제가 생긴다고 우리술 협동조합장 정회철씨(51·전통주조 예술대표)는 말한다. 변호사 출신이면서 헌법학 교재 집필자로 유명한 정씨는 뒤늦게 전통술 빚기에 빠져 강원도 홍천으로 귀촌한 경우다. 단호박으로 만든 생탁주 ‘만강에 비친 달’을 지난해 출시했다. 그에 따르면, 대기업 의존 구조가 심화될수록 ‘을’은 ‘갑’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납품 가격을 낮추라면 낮춰야 한다. 그러다보면 더 이상 좋은 재료, 좋은 술을 고집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마트나 주류 판매점을 어렵게 뚫어 진입해도 문제는 남는다. 이런 데서는 판매원이 소비자의 선택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판매원이 전통술을 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니, 오히려 손님이 전통술을 집어 들면 “요즘 그 술 인기 없어요”라며 훼방을 놓는 것이 현실이라고 예산사과와인 정제민 대표는 분통을 터뜨린다. 이유는 하나. 전통술 마진이 약해서다.

ⓒ시사IN 조남진
지평양조장은 오동나무 상자에서 효모를 배양하는 등 전통 방식으로 막걸리를 빚는다.
이정창 보르노와인주류백화점 대표에 따르면, 전통주 판매마진은 15% 안팎이다. 30%대인 위스키, 35~40%대인 와인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와인 같은 경우 마진을 50% 가까이 보장하기도 한다. 판매업자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움직일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런 이유로 협동조합에 거는 기대가 크다고 이 대표는 말한다. 전통술 생산자들이 공동 구매 등을 통해 다른 데서 비용을 아끼고 그만큼 적정 마진을 보장해 준다면 주류 도소매상 또한 전통술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명절이면 주류 판매점에서 전통술을 찾는 손님들도 많다.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본다.”

ⓒ시사IN 조남진
종전 60주년 기념술로 한정 생산한 ‘자유를 위하여’.
전통주 생산자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공동 구매를 하게 되면 당장 쌀·밀 같은 원재료나 포장재의 구매 단가를 낮출 수 있지 않겠느냐고 이들은 기대한다. 김기환 사장은 3년 전 ‘자유를 위하여’라는 브랜드로 프리미엄 전통술을 만든 일이 있다. 지평막걸리 양조장이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프랑스 군대의 지휘소로 쓰였다는 데 착안해 종전 60주년 기념술로 한정 생산한 것이다. 문제는 술병이었다. 고급 술답게 따로 디자인한 유리병에 담아 이를 팔고 싶어도 적은 개수는 주문이 불가능했다. 유리병 회사는 최소 10만 병 단위로 주문을 받는다고 했다. “설사 주문을 한다 해도 소규모 양조장 가운데 몇 만 병 쌓아놓을 공간을 확보한 데가 어디 있겠느냐”라고 김씨는 반문한다. 소규모 전통술 생산자들이 플라스틱 술통 내지 기성 술병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생산자들이 힘을 합치면 이런 문제부터 시작해 하나 둘씩 실질적인 문제 해결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정회철 조합장은 말했다. 이미 협동조합에 유리병을 제작해 주겠다고 약속한 제조업체도 생겨났다. 그런데 조합원 모두가 같은 유리병을 쓰면 오히려 개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경기대 산하 전통술 교육기관인 ‘수수보리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조효진 교수는 말한다. “와인이나 사케는 병 디자인이 거의 통일돼 있다. 내용물과 라벨이 다를 뿐이다. 유통 과정에서의 효율성을 위해 양보할 것은 양보해야 한다.”

수수보리 아카데미는 우리술 협동조합이 탄생하는 산파 구실을 한 곳이기도 하다. 조합원 대부분이 이곳을 거치며 경험과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이들은 이른바 막걸리 열풍이 불 때도 기대보다는 위기감을 느꼈다고 한다. 막걸리가 반짝 각광받는다고 전통술이 살아난 것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막걸리 열풍 역시 대기업 위주의 수출 전략과 맞물려 있었다. 막걸리의 일본 점유율 같은 거품에 주목하는 사이 전통술은 그나마 있던 자리마저 빼앗겼다”라고 정제민 대표는 말했다. 한 예로 전통술 중 가장 많이 팔리던 복분자주 같은 경우 막걸리 열풍으로 소비량이 5분의 1 가까이 줄었다는 것이다. 정 대표는 “어쩌면 막걸리를 내세워 전통술이 마지막 불꽃을 활활 태운 것은 아닐까라는 비관적인 생각마저 든다”라고 말했다.

막걸리 열풍 때 오히려 위기감 느껴

물론 전통주 생산자에게도 문제는 있었다. 탁주를 예로 들면 전국의 막걸리 맛은 갈수록 평준화되어 간다. 다루기 쉬운 일본식 누룩인 ‘입국’을 쓰면서 맛과 향이 획일화되고 아스파탐 같은 감미료로 단맛을 내기 때문이다. 반면 전통 방식을 고집하는 소수는 폐쇄적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장인이 만드는 술로 마니아들에게 널리 알려진 한 막걸리는 여름 술맛과 겨울 술맛이 다르다. 이유를 물으면 계절에 따라 발효 과정이 달라서 그렇다는 식이다. 그러나 술에서 냄새가 나는 것은 결국 오염됐기 때문이고, 이는 품질 관리가 안 되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라고 조효진 교수는 잘라 말한다.

우리술 협동조합은 양조장마다 전통 방식으로 고유의 술을 생산하며 다양성을 지키되, 품질 관리의 현대화·과학화를 이루어야만 전통술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데 동의하는 생산자들로 이루어졌다. 여기에 술 애호가, 유통 전문가 등이 결합하면서 현재 조합원은 50여 명에 이른다. 지난 1월18일 창립총회를 열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조합은 올해 안동·제주 등 관광객이 많이 모이는 지역에 전통술 공동 판매장을 낼 계획이다. 비용은 공동 출자금으로 충당한다. 혼자서는 불가능했던 일을 여럿이 힘을 모아 현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협동조합 방식이 생소한지라 이들도 처음에는 시행착오가 많았다. 기존 전통주 협회 등과 뭐가 다른지 헷갈려하는 조합원도 있었다. 이에 대해 정회철 조합장은 “친목 위주로 운영되던 기존 협회와 달리 협동조합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실질적 사업을 집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확실한 차이가 있다”라고 말했다. 집행부가 의사결정을 좌우하는 협회와 다르게 일반 조합원이 ‘1인1표’ 원칙에 따라 의결권을 행사함으로써 민주적인 운영을 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더 큰 차이는 절실함이다. 정 조합장은 “현재 한 달에 1000병 정도를 생산하는데 술이 인기를 끈다 해도 사업적으로 키울 생각은 없다. 문제는 지금의 술 산업 구조로는 사업은커녕 생존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생존조차 불투명하겠다는 절박감이 이들을 협동의 길로 이끈 셈이다. 협동조합 준비 초기에는 기존에 해왔던 관성에 따라 정부 지원을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전직 차관급 정도를 협동조합장으로 추대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협동조합에 대해 공부할수록 이것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고 조효진 교수는 말한다. “관군 기다리다 전쟁 끝난다. 지금은 의병이 나서야 할 때다”라고 최종 결론을 내리게 됐다는 것이다.

향후 공동 사업이 진행되면 이들 내부에도 이견과 갈등이 표출될 수 있다. 모든 동업이 쉽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럼에도 저가 수입 술의 공세와 대형 주류업체·유통자본의 포위망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결론은 하나, “약자끼리 힘을 뭉칠 수밖에 없다”라고 정회철 조합장은 말한다. 이는 오늘날 전통술뿐 아니라 동네빵집, 슈퍼마켓, 세탁소 등 대자본의 공세에 고통 받는 생산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얘기일지도 모른다.

우리술 협동조합 성공 비결 3줄 요약
·의식 공유:이대로 가면 전통술은 다 죽는다.
·행동 공유:관군은 오지 않는다. 의병 스스로 나선다.
·비전 공유:고급화·현대화하되 다양성을 잃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