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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록

윤동주- 쉽게 쓰여진 시

by 아잘 2013. 7. 17.

 

이전에도 포스트한 적이 있지만 다시 올려본다.

유학생의 마음을 이렇게 잘 표현한 글이 또 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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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쓰여진 詩

윤동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줄 알면서도
한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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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d1945.com/index.php?mid=ssg&document_srl=3075&sort_index=blamed_count&order_type=desc

[시대처럼 올 아침과 최초의 악수를]

 

  1942 4 2, 도쿄 릿쿄대학에 입학한 시인은 이해 6 3일에 이 시를 썼다. 그 후 시인은 이 시와 함께 일본에 가서 쓴 《흰 그림자》, 《흐르는 거리》, 《사랑스런 추억》, 《봄》 등 다섯 수를 릿쿄대학 용지에 베껴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로 보냈고 이렇게 남겨진 이 시가 결국 시인이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물론 시인이 1943 7 14, 쿄토에서 《독립운동》죄목으로 체포된 후 일본경찰당국에 압수당한 상당한 분량의 작품과 일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까지 나타나지 않아 그 후의 작품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시는 또 1947 2 13일자의 《경향신문》에 당시 이 신문 편집국장이던 정지용시인의 소개문과 함께 실려 광복 후 최초로 발표된 시인의 유작이 되었다. 이 시는 이와 같은 전기적인 사실로 시인의 행보와 삶의 의미를 추적하는데 소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시와 운명을 같이한 시인의 작품세계 전반을 해석하고 그 문학사적 지위를 규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근거를 제공하는 작품으로 된다.

 

  형식상 전체 10개 련으로 구성된 이 시는 제7련만 3행이고 기타는 모두 2행으로 이루어지었다. 작품의 대부분 시행은 34내지 56음보를 유지하면서 비교적 순통하고 자연스러운 운률을 형성하였다. 이와 같은 운율조성은 시인이 자신의 부끄러움에 대해 참회하고 부모와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엮으며 나아가 실존적자아를 초월하는 희망에 대한 예감을 읊조리는 등 시적화자의 조용한 독백에 호흡을 맞추기 위한 것이다.

 

  이 작품은 내용상으로 크게 1련부터 7련까지를 첫째 부분으로 8, 9, 10련을 둘째 부분으로 나눠진다. 시는 먼저 첫 련에서 《밤비》와 《육첩방》의 이미지로 시공간적 환경을 제시하면서 시인이 처하고 있는《남의 나라》라는 현재의 엄혹한 상황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악조건 하에서도 시인은 이 《한 줄 시를 적》는 《천명》을 거역하지 못한다. 시인의 시인됨은 하늘의 명령이며 그것은 또한 극도로 민감한 상처의 능력이기에 슬픈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슬픔에 민감한 자신의 기질적 우수를 이미 알고 있으며 이와 같은 하늘의 명을 받드는 수명(受命)의 결연한 의지를 토로하고 있다. 이어서 적국에까지 자식을 유학 보낸 향리의 부모에게 생각이 미치게 되고 육친에 대한 감읍과 자괴의 심정이 나타나며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이 부끄러움이란 보다 큰 덕을 인지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감정이며 도덕적 완성의 단계를 가장 확실히 입증할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또한 이 부끄러움의 감정은 꾸밈없고 무구하다는 점에서 어린이의 순진함과 닮아 있어서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로 이어지는 시상의 전개는 언뜻 무관하게 보이나 긴밀한 맥락의 결합위에 얹혀있는 것이다.

 

  제7련에 와서 시인은 《쉽게 씌어지는》 시가 부끄러운 일로 명백히 인지되는 순간에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는 가파른 현실인식이 뇌리를 자극한다. 그래서 그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어려운 인생을 살면서 자신은 시를 너무 안이하게 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시의 두 번째 부분은 제8련이 제1련의 행의 순서를 바꾸고 약간의 어미변형을 이루면서 시작한다. 이렇게 다시 처음의 시적상황을 되풀이하여 어두운 현실의 분위기를 부각시키고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워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린다. 이러한 자기다짐 속에서 갈등하는 두 자아가 화해롭게 만난다. 《나는 나에게》, 이렇게 두 사람의 자신을 악수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두 사람의 《나》는 하나는 《홀로 침전하는》 그래서 부끄러운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즉 반성적 자아를 가리킨다. 이와 같은 따뜻한 체온의 나눔이 감지되는 악수의 이미지는 먼 길을 돌아온 시인의 또 다른 자기 응시가 된다. 이렇게 시인은 이 작품에서 부끄러움의 정서를 거짓 없이 드러냄으로써 그의 작품세계의 대표적인 시적주제로 나타나는 자아성찰의 경지를 원만하게 이루어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