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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칼럼

번아웃이 최대의 적이다

by 아잘 2016. 7. 14.



[청춘직설]지친 삶과 즐기는 삶

김성찬 |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입력 : 2016.07.12 21:24:00 수정 : 2016.07.12 21:30:33           



내가 일하는 병원은 10층짜리 상가 건물에 입주해 있다. 1, 2층에 병원, 식당 몇 곳이 있을 뿐, 3층부터 10층까지는 온통 학원이다. 영어, 수학, 국어등을 가르치는 전통적인 학원은 물론이고 ‘브레인 컨설팅’을 한다는 영재교육센터도 자리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어, 레고, 로봇, 프로그래밍을 교육하는 학원까지 들어섰다.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는 오후 2~3시경부터 건물은 북적이기 시작한다. 7시경 근처 식당에 가면 엄마와 아이 단둘이 저녁 식사를 하는 풍경을 흔히 볼 수 있다. 얼른 다시 학원에 들여보내기 전 잠깐 저녁을 먹이는 것이다. 건물 근처가 가장 번잡한 시간대는 밤 10시다. 그 시간이면 건물 앞뒤로 차가 빼곡히 늘어서 있다. 아이들을 집으로 실어나르는 셔틀버스와 부모의 차량들로 건물 근처에 일대 혼잡이 일어나는 것이다. 주차장이 있는 건물 뒷길로는 차량 진입이 거의 어려운 지경이 된다. 매일 밤 이런 일이 벌어진다.


직장인들이 저녁 식사 후 ‘야근’이라는 이름의 잔업을 수행하듯 아이들은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공부를 이어간다. 아이들에게 학업은 이미 ‘유사직업’이나 마찬가지다. 어른들은 노동의 결과로 월급을 받지만 학생들은 고된 학업의 결과를 점수로 받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좋은 성적표가 좋은 학력으로 이어지고, 학벌은 직업 시장에서 높은 급여와 연관이 있다고 배운다. 배움과 성장은 온데간데없고 어딜 가나 입시와 취업에만 초점을 맞춘다. 아이들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직업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학생이라는 나쁜 직업을 꾸역꾸역 감당하며 산다. 이게 현실이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중·고생들의 말을 들어보면 직장생활에 지쳐 있는 어른들의 얘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요새는 새벽 2시쯤 자요. 할 게 너무 많아요. 피곤하고 머리가 너무 안 돌아가요. 인생이 맨날 똑같으니까 지겨워요. 평소엔 지루해서 죽을 것 같다가도 시험기간만 다가오면 오히려 딴짓, 딴생각을 하게 돼요. 꿈은 사치 같아요. 있긴 하지만 감정이입이 안돼요. 주위에서 기대하는 만큼 못하고 있으니 한심하죠. 도망가고 싶어요.”


독일의 소아청소년정신과 의사인 미하엘 슐테-마르크보르트는 <번아웃 키즈>에서 번아웃 증후군이 어른 세계에서 아이 세계로 전이되고 있다고 경고한다. 슐테-마르크보르트 박사는 부모의 피로와 불행이 아이들에게 전염되는 과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아이들은 행복한 부모를 원한다. 그래서 적어도 마음속으로, 정신적으로 부모에게서 부담을 떼어내어 자기 어깨에 짊어진다. 아이들은 함께 나르기를, 함께 돕기를 원하며, 그러면서 종종 과로의 감정까지 넘겨받는다.”


부모는 자녀에게 좋은 삶을 물려주기 위해 힘들게 일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아이들에게 전달되는 건 번아웃이 빈번한 라이프스타일과 이에 따른 부정적인 생활감정이다. 행복하려고 일하지만 일로 행복의 가능성을 파괴하는 일들을 아이들은 숱하게 보고 자라는 것이다.


부모 세대가 노동을 강압적인 것으로 인식하듯 아이들 역시 공부를 강제적인 것으로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노동 윤리와 학습 윤리는 맞닿아 있다. 공부를 고역으로 생각하는 아이는 일도 고역으로 생각하는 아이로 자란다. 직장인들은 스스로를 사축(社畜)이라 자조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학축(學畜)이 있다.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인 학업을 강요당하는 현실에서 2016년 현재 우리나라의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는 OECD 22개 국가 중 꼴찌다. 학력과 계층을 대물림하는 데 전전긍긍한 나머지 아이들에게 삶의 만족을 전달하는 데는 명백히 실패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계하려면, 무턱대고 공부를 강요하기에 앞서 부모 먼저 균형 잡힌 삶을 추구하고 직장과 사회가 이를 지지해야 한다. 노동의 적은 게으름, 나약함만 있는 게 아니다. 진짜 적은 지나친 성과주의, 불안, 과로에 있다. 충분한 존중과 보상 없이 일하고 비인간적인 수준으로 몸을 혹사하는 데서 오는 ‘번아웃’이 최대의 적이다. 이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부모는 건강한 삶과 행복한 생활감정을 유지하는 데 더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소진되지 않는 범위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나머지는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그게 자신을 지키고 아이도 보호하는 길이다. 아이들은 어른의 말이 아니라 행동의 뒤를 좇는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이들은 섬세한 눈으로 가족과 사회 안에서 역할모델을 포착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해나간다.


아이에게 대대로 지친 삶을 물려줄 것인가. 우리에게 대안이 없으면 아이도 없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고 가는 건 결국 시간이고 기억이고 삶이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 삶의 흔적을 물려주고 떠난다. 삶의 전 영역에서 성장하고 휴식하고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부모로서 해줄 건 그것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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