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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칼럼

트럼프 지지자와의 대화

by 아잘 2016. 7. 14.



[세상 읽기]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와의 대화 / 이원재

등록 :2016-07-12 20:13수정 :2016-07-12 20:18


이원재
경제평론가


“오바마는 백인을 싫어해요. 아니, 사실 오바마는 미국을 싫어하는 것 같아요.”

40대. 가장. 백인. 남성. 미국인. 제러미는 민주당 소속 미국 대통령을 믿지 않았다. 사실 그는 공화당을 이끄는 정치인들도 믿지 않았다. 모두가 자신을 속이는 워싱턴의 기득권층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5월 유럽의 한 민박집에서 우연히 옆방에 묵게 되어 시작한 가벼운 대화는 곧장 미국 정치 이야기에 다다랐다. 제러미는 현재 미국 언론도 모두 기득권층에게 붙잡혀 있다고 여겼다. “<뉴욕 타임스>도 <시엔엔>도, 심지어 <폭스뉴스>까지도 순전히 거짓말로 가득 차 있어요.” 제러미에게 언론이란 워싱턴 정치인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나팔수일 뿐이었다. 그에게는 오로지 도널드 트럼프만이 영웅이었다.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와 그 이후 논의과정을 지켜보던 나는 문득 제러미를 떠올렸다. 영국이 유럽연합을 떠나야 한다는 데 투표한 영국인 백인 노동자 상당수는 자신을 ‘전형적인 영국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었던 것 같다. 제러미 역시 자신이 ‘전형적인 미국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실제로 군대를 다녀왔고 직장생활도 했으며 지역에서 작은 사업도 했던 흔한 가장이고 소시민이었다.

나는 묻고 또 물었다. 정말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일까? 표면적으로 제러미를 화나게 만드는 질서는 ‘자기들끼리만 잘난’ 워싱턴의 주류 정치인들과 주류 언론이었다. 잘난 척하는 실리콘밸리의 기업가들도 그의 화를 돋우었다. 그 내용은 자유와 평화의 가치, 세계화의 미덕, 반인종주의와 페미니즘 같은 쓸모없는 것들(bullshit)로 채워져 있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제러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일종의 불안이 자리잡고 있었다. 자신들이 ‘지배하며 포용’하는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사실은 대등하게 공존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게 명확해지면서 생긴 불안이다. 어쩌면 자신이 지배받으며 포용당하는 대상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공포다. 브렉시트와 도널드 트럼프 현상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내는 이들이 있다. 진보적인 이들도 많다. ‘노동자들은 세계화의 피해자였을 뿐’이라는 시각이다.

진보주의자가 이런 태도에 공감하는 것은 불편하다. 지배와 복종의 질서를 공존의 질서로 만들려는, 전쟁 없는 세계를 만들려는 유럽연합의 이상주의는 여전히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그들이 천명한 지속가능한 발전의 가치, 즉 시장질서에 환경과 인권과 노동 등의 사회적 가치를 조합해 빚어낸 사회 비전보다 나은 것은 아직 찾기 어렵다.

제러미를 만나기 전 나는 독일 뮌헨에서 베엠베(BMW)재단이 연 ‘세계 책임있는 리더 포럼’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놀라운 공존의 노력을 목격했다. 뮌헨의 사회혁신가들은 연간 예산 3천억원 규모인 초대형 시민극장을 시리아 난민들에게 활짝 열었다. 매주 월요일이면 웰컴 카페를 열어 보드게임을 하고 공연을 하고 아이들 놀이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난민들 스스로 기획한 문화예술공연과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기존 시민과 어울린다. 독일 사회의 이민자 출신 언론인, 예술가, 지식인 등이 모여 기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공연도 만들어 ‘열린 국경 회의’를 열기도 한다. 진보주의는 이들 편에 서는 것이 맞다.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1980년대 미국 남부가 지금보다 인종갈등이 덜했다는 제러미의 말을 나는 이해하지만 공감할 수는 없다. 그와 동갑내기인 유색인종 미국인은 그와 전혀 다른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화란 그 모든 기억의 차이를 맞춰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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