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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카자흐스탄 키메프 대학 총장 방찬영

by 아잘 2013. 2. 12.


http://www.dailymotion.com/video/xuhpix_yyyyy-yy-yyy-yy-yyy_school#.URnJWqWRP0c


카자흐스탄 최고 대학의 총장, 방찬영 다큐멘터리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8156866&cloc=olink%7Carticle%7Cdefault



제66편
카자흐스탄 최고 대학의 총장, 방찬영 

방송 : 2012년 10월 20일 저녁 7시 10분 KBS 1TV
CP : 박복용
PD : 장강복
글, 구성 : 윤영수
진행 : 이현주 아나운서 / 나레이터 : 배창복 아나운서


교육을 통해 카자흐스탄에 미래를 선물한 사람! 
중앙아시아 최고의 상아탑 "키맵 대학교"의 설립자이며 총장인 방찬영 (77)
낡은 공산당 간부학교를 카자흐스탄을 이끌 인재 양성소로 탈바꿈 시킨
카자흐스탄 대학 교육의 아버지,
방찬영 총장의 도전과 성공을 만나러 간다.


"방찬영 총장은 카자흐스탄의 영웅입니다.
그는 교육을 통해 카자흐스탄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나데즈나, 카자흐스탄 정부 법률 고문

"방찬영, 그는 카자흐스탄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스승입니다."
-갈리나, 카자흐스탄 대통령 비서실장


중앙아시아의 떠오르는 경제 강국 카자흐스탄. 카자흐스탄은 지금 적극적인 시장개방 정책과 풍부한 지하자원을 통해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경제 수도 알마티에는 중앙아시아 최고의 대학, ‘키맵 대학교’가 있다. 키맵 대학교의 설립자이자 총장은 바로 한국인 방찬영 총장! 

러시아어가 공용어인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고 일반 대학에 비해 10배 이상의 등록금을 받음에도 학생들은 대학교에 무한한 만족과 감사를 표한다. 카자흐스탄에 진출한 세계 유수의 기업과 국제 금융기관은 키맵 대학교의 졸업생을 데려가기 위해 몰려든다. 또한 대통령이 나서서 ‘국립대학은 키맵을 보고 배우라’고 한다. 이처럼 키맵 대학교는 독보적이다. 이제 키맵 대학교는 중앙아시아를 넘어 세계가 주목하는 학교로 발돋움 하고 있다.

공산주의의 낡은 습관이 남아있는 카자흐스탄의 척박한 교육환경에서 중앙아시아 최고 대학을 만든 방찬영 총장. 그의 숭고한 교육철학과 열정을 오는 10월 20일(토) 저녁 7시 10분 <글로벌 성공시대> 제66회 “카자흐스탄 최고 대학의 총장, 방찬영”편에서 만날 수 있다.


1. 교육으로 이루어낸 카자흐스탄의 개혁
방찬영 총장은 1964년 연세대 상경대학을 졸업, 홀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72년부터 UCLA와 샌프란시스코 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종신 교수로서 활약하였다. 샌프란시스코 대학 아시아 태평양 연구소장으로 재직하던 운명의 1989년, 그는 자신의 지식이 연구소가 아닌 그것이 필요한 실제 사회에서 쓰이길 바랐다. 그가 눈길을 돌린 곳은 개혁과 개방으로 혼란에 휩싸인 신생 독립국 카자흐스탄. 그렇게 방찬영 총장은 따뜻한 켈리포니아의 연구소에서 개혁의 시린 칼바람이 부는 카자흐스탄으로 떠났고,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고문이 된다. 그는 대통령의 경제 특별 보좌관으로서 개혁 정책을 진행한다. 하지만, 70여년 묶은 공산주의의 관행은 그의 개혁정책을 더디게 하였다. 

그때 방찬영 총장은 카자흐스탄 교육의 역사를 바꾼 도전을 시도한다. 바로 카자흐스탄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의 요람, 대학교의 설립이었다. 그로부터 20년 후, 전에 없던 새로운 학교를 만들겠다는 그의 피나는 노력 끝에 키맵 대학교는 카자흐스탄은 물론이고 중앙아시아를 선도하는 최고의 대학교이 되었고, 배출된 8000여명의 졸업생들은 카자흐스탄의 발전을 이끄는 주역이 되었다. 카자흐스탄은 평균 경제 성장률이 10%에 달하는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로 발돋움 하였다. 그렇게 그는 '교육으로 세상을 바꾼다.' 라는 키맵 대학교의 이상을 현실로 만들었다.


  


2. 청렴성과 투명성, 최고의 대학으로 가는 유일한 방법
키맵 대학교가 지금의 자리에 있기까지, 방찬영 총장은 구소련 체제의 낡은 습관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이에 맞서는 그의 무기는 청렴성과 투명성이었다. 카자흐스탄 교육부는 수시로 낡은 잣대를 들이대며 키맵 대학교의 인허가를 번복하였고 검찰 총장은 아들이 부정행위로 정학을 받자 방찬영 총장에게 공갈과 협박을 일삼았다. 그러나 방찬영 총장은 그에 휘둘리지 않고 끝까지 투명성과 정직의 원칙을 지켰다. 예산, 운영, 징계위원회에 학생을 참여 시켰고 30%의 의결권을 주었다. 그는 학생이 주인인 학교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단순히 투명성이라는 교육철학을 실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산주의를 강요받던 학생들에게 자유와 책임이라는 민주주의 사상을 일깨워준 것이었다.

키맵 대학교는 20년이라는 짧은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유수의 기관에서는 유일하게 세계 최고 대학들끼리 학생과 학점을 공유하는 <볼로냐 프로세스>에 가입하였다. 이는 투명성과 청렴성, 방찬영 총장이 목숨처럼 지키려했던 교육 철학으로 이룩해낸 성과이다.

 


3. 꿈이 있는 한 청춘이다. 
공산당 간부학교를 국가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인재 양성소로 환골탈태시킨 방찬영 총장. 그에겐 또 하나의 큰 꿈이 있다. 카자흐스탄 경제 개혁과정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언젠가 일어날 북한의 경제 개혁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것이다. 북한의 경제 발전을 주도해 나갈 인재 양성을 위해 또 하나의 대학을 설립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꿈이다. 자신의 쓰임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겠다는 방찬영 총장. 그는 영원한 청춘이다.

 

"실패만이 한 사람을 위대한 지도자로 만들고 
인생의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게 합니다.
실패하면 좌절하지 말고 다시 한 발자국 걸어가고 
또 한 발자국 걸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위대한 여정입니다."
-방찬영 총장






[Saturday] 세계 속으로 카자흐 키메프 대학 총장 방찬영

[중앙일보] 입력 2012.05.12 00:10 / 수정 2012.05.12 00:28

20년 만에 … 취업률 90% 중앙아시아 최고 대학 만들다

[사진 키메프 대학]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이하 카자흐)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국회에서 말했다. “왜 볼로샥(청년 국가 장학생)과 키메프대 졸업생만 졸업 즉시 취직되는가…. 우리 대학들은 뒤처져 있다.” 대통령이 칭찬한 카자흐의 키메프(KIMEP)대학. 그 성공 신화가 나오기까지 올해로 20년이 걸렸다.

그 연설 이틀 전인 25일 키메프대 정기 이사회. 미국 국적의 한국인 방찬영 총장은 “2011년 졸업생 90% 이상이 취업했다”고 보고했다. 분야는 회계·금융·무역·석유 같은 알짜배기였다. 2010년엔 87%, 2009년엔 79%. 날로 취업률이 높아진다. 방 총장은 “우리 대학 졸업생이 없으면 현지 딜로이트 회계법인은 운영이 안 된다. 우리 문제는 경쟁자가 없는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그럴 만했다.

졸업생 나굴즈(여)는 “회계법인 어네스트 영과 카자흐 석유사 카즈메니 가즈에서 오퍼가 왔는데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4개 오퍼를 받은 학생도 있다. 삼성전자 현지법인은 직원 50%가 키메프대 출신인데 최근 8명을 더 뽑았다. 삼성 카자흐·중앙아시아법인의 김승구 법인장은 “학생들이 우수하고 충성심도 있고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했다. 월급은 당연히 높다.

이 대학 등록금은 연 7000달러. 2009년 1인당 국민소득이 6700여 달러니 꽤 높다. 그래도 입학생이 늘고 기자가 만난 20명의 학생은 다 만족한다고 했다. 게다가 인근의 ‘탄자 돌림 가난한 나라’에서 150명을 뽑아 여러 장학금을 준다. 동문도 빵빵했다. 1994년 졸업생인 자르볼로바 사이다는 ING은행의 CEO, 디야로브 다우렌은 국영통신사 이사장, 2000년 졸업생 우마로바 갈리나는 에어 아스타나 부사장이다. 키메프는 그렇게 카자흐와 중앙아를 통틀어 가장 급성장하는 최고 사립대학이다.

키메프 대학 전경.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그래서 키메프를 ‘대학의 엄친아’로 꼽았지만 그리되기까지 키메프와 방 총장의 20년은 험하고 길었다. 뿌리는 더 멀리 옛소련까지 거슬러 오른다. 그는 젊은 시절 소련과 카자흐에 얽혀 들었다. 연세대를 졸업, 64년 미국 유학을 떠나 75년 샌프란시스코 대학 교수 겸 아시아문제연구소장이 됐다. 소련을 오가며 세미나를 23번씩 했다. 개혁·개방이 화두이던 시기. 그는 이즈베스티야·프라우다 같은 소련 유력 언론에 거듭 등장했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에서 동북아 안보 문제로 강연을 했고 노태우 정부 시절엔 특사로 소련과의 국교 수립을 거들었다.

90년 6월 비로소 당시 소련 총리의 소개로 모스크바에서 카자흐 서기장이던 나자르바예프를 만났다. 시내 카자흐 연락사무소에서 4시간 동안 진지하게 얘기했다. 어떻게 개혁할지 고민하는 서기장에게 방 교수는 “사유화가 필요하다” 했고 성공한 한국 얘기를 들려줬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거의 붙어 다녔다. 91년 방 교수는 서기장 특별보좌관 겸 개혁위원회 부위원장이 됐다. 또 그의 소개로 고르바초프를 알마티와 모스크바에서 두 차례 만났다. 방 교수는 씁쓸해했다. “고르바초프는 ‘미국 교수가 사회주의를 무너뜨리려 하나.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자랑스러운 공산주의자로 죽었다고 무덤에 쓰이길 원한다”고 한 것으로 회상했다.

91년 4월 나자르바예프는 방찬영 및 참모들과 새벽까지 예의 ‘개혁 토론’을 했다. 교수는 “대학을 세워 인재를 키우자”고 했다. 그달 말 서기장은 공산당 중앙당 간부학교를 방 교수에게 내줬다. 구체제의 수호자인 당 간부를 키우는 센터였다. 그러나 돈 지원은 없었다.

키메프 대학원 과정을 시작했다. 카자흐엔 생소한 행정·경제·경영학과를 만들어 110명을 뽑았다. 박사 학위 없는 미국인 자원자 10명과 총장이 된 방 교수가 직접 가르쳤다. 그리고 호소편지를 썼다. 당시 유럽공동체엔 서기장 명의로 350만 유로를 요청했다. 그러자 ‘대학은 무슨. 사람 보내면 교육해 주겠다’고 냉소했다.

91년 8월 모스크바에서 쿠데타가 터졌다. 모든 게 끝나는가. 숨죽이며 밤을 새우자 새 세상이 밝았다. 독립국가 카자흐의 탄생이었다. 92년 유럽공동체는 세 사람을 보냈다. 지스카르 데스탱 전 프랑스 대통령의 동생이 대표였다. 그는 총장에게 “예의상 왔으니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두 시간 특별 강연에서 학생들의 열의에 녹아 확 변했다. 몇주 뒤 450만 유로 지원을 알려 왔다. 영국도 25만 파운드를 지원했다. 미국·캐나다도 합류했다. 그러나 교수와 수업 장비를 모두 지원받기 때문에 방 총장은 실권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대학은 학생 400명, 외국인 교수 30명으로 착착 커갔다.

방 총장은 93년 말 서울로 왔다.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가 대소 관계 개선을 지원해 달라고 해서였다. 열심히 일하는데 그만 95년 삼풍 백화점 붕괴로 가족 모두를 잃었다. 극한의 고통을 겪으면서 96년 카자흐로 돌아온다. 키메프는 엉망이었다. 고람 모스타파 학장은 “쓰레기가 뒹굴고 개들이 들끓었다”고 했다. 지원 중단 통보가 왔으니 문을 닫자는 교수도 있었다. 밀린 교직원 월급에, 장학금까지 더해 빚도 300만~400만 달러나 됐다.

그런데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또 맡으라고 했다. 의욕이 없었다. 거절해도 거듭 불렀다. 국제 투기 자본가 조지 소로스가 관심을 보였지만 대통령은 오로지 방 총장이었다. 계속 고사하자 대통령은 “마음대로 해라. 그런데 닫으면 정치문제가 된다”고 했다. 결심했다. 대통령 산하 국립대인 키메프를 사립대로 바꾸고 일반 대학으로 전환키로 했다. 설립 당시 키메프의 운영·예산·인사·해고권을 ‘방찬영’ 1인에게 준 법령이 근거였다.

그리고 개혁했다. 말썽을 부리는 외국 교수 30명을 내보내고 학교를 휘어잡았다. 그렇게 질서가 잡혀 갔다. 폭풍 성장이 시작됐다. 학생이 400명에서 900명으로 되더니 곧 1500→2200→3000→4000→4500→5300명으로 팽창했다. 등록금이 싸지도 않다. 96년 700달러였던 연간 등록금이 지금은 7000달러. 당시도 지금도 주로 중상층 자녀가 온다. 수입이 안정되자 교수진도 탄탄해졌다. 회계학 담당인 엘리아 교수를 거액 연봉 6만 달러로 첫 초빙한 뒤 외국인 교수가 줄을 이었다. 현재 평균 연봉은 7만~7만5000달러다. 카자흐 국립대 교수의 연봉은 최대 1만2000달러 정도다.

방 총장의 명성도 커갔다. 2005년 대통령은 그를 부총리급인 아스타나 도시개발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역사에 남는 도시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서명 하나에 100만 달러를 주겠다는 검은 유혹이 뻗쳐 왔다. 석유 메이저도 접근했다. 다 물리쳤고 취임도 안 했다.

그런데 2007년 국제 금융위기의 격랑이 키메프를 쳤다. 고유가 덕에 떵떵거리던 카자흐의 금융이 무너지고 경제가 얼어붙었다. 학생은 학비가 싼 국립대로 몰렸고 키메프 학생은 3200명으로 추락했다. 학교는 수년간 허리띠를 졸라맸다. 요즘은 연 잉여금이 1000만 달러씩 되고 경기도 회복돼 학생이 는다.

지금 가장 큰 어려움은 현지와의 갈등이다. 2009년 학생이 커닝으로 정학 2년을 받자 아버지인 검찰 부총장이 들볶았다. 방 총장에게 “비리를 다 안다”고 협박했다. 같은 해 국세청이 엉뚱한 세금 55만 달러를 때렸다. 대통령 ‘어전 회의’에서 “잘못이 있다면 대학을 반환하겠다”며 사표를 던지는 강수로 문제를 해결했다. 키메프 대학 자산은 방 총장측이 60%, 카자흐 정부가 40%를 소유한다. 인가 취소 협박도 짜증이다. 문교 당국은 서구 박사인 Ph D를 인정할 수 없다느니, 학생당 공간이 좁다느니 하며 벌써 두 번이나 인가를 취소했었다. 그때마다 대통령의 호된 질책과 방 총장의 으름장으로 해결했다. 요즘은 대학원에서 대학교로 바뀌면서 생긴 문제로 또 시비가 걸려 있다. 다 옛 소련 규정을 무리하게 적용하려해서 생긴 문제다.

방 총장은 “대통령이 밀어주고 칭찬하니 질시를 받는 것이며 대책은 투명한 운영뿐”이라고 했다. 비리에 무관용 정책을 쓰고, 학생을 예산·징계·입찰 위원회에 앉혀 교수·직원과 함께 30%의 표결권을 갖게 했다. 교수도 엄격히 관리한다. 영어만 쓰고 러시아어는 금지다. 163명 교수 중 외국인은 23개국서 온 69명. 70%가 박사다. 3년 내 세 개 이상 국제 수준의 논문을 못 내면 퇴출이다. 올해에 벌써 39명이 나갔다. 90개 이상의 대학과 파트너십을 맺고 독일 훔볼트대, 영국 그래스고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 한국의 연세대 등과 복수학위 협정을 맺었다. 지금 13개 대학과 협상 중이다. 한국에선 고려대·성균관대·중앙대·서강대다.

방 총장은 “내 꿈은 카자흐 교육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더 잘 운영할 사람이 있으면 당장 떠날 수 있다”고 했다. 또 “한국 대학생은 시야를 넓혀 해외로 진출해야 한다. 왜 포화상태인 미국만 고집하느냐”며 “키메프는 영어·러시아어를 마스터하고 지역 전문가가 되는 3개의 이점을 준다”고 했다. 현재 외국 학생은 231명, 한국 학생은 32명이다. 동국대를 다니다 키메프에서 새로 시작한 황현태(28) 경영학과 학생은 “여기에 훨씬 더 좋은 미래가 있다”고 했다. 마케팅학과 조경민(25) 학생도 같은 의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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