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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진중권 오디세이

by 아잘 2013. 5. 25.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524164528


두 번째 '박통' 맞은 진중권, 파란만장 '스타트렉'!

[노정태의 논객시대] 미학자이자 논객(이었던) 진중권의 책들

노정태 자유기고가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5-24 오후 6:49:28

    

     

1.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며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의 서문을 인용해도 식상하지 않았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저 문장이 어떤 용도로 어떻게 쓰였는지 안다면 이건 너무 지겨운 인용이다. 반면 처음 접한 사람이라면, 대체 저 뜬금없는 소리가 무슨 말인지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은 '하늘의 별'이나 '가야만 하는 길' 같은 아름다운 비유가 너무도 허공에 붕 떠버린 탓이다.

▲ <미학오디세이>(진중권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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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해방되어야 할 노동자 계급이 있었고, 외세에 의해 반으로 쪼개졌지만 결국 다시 하나가 되어야만 할 조국이 있었고, 쟁취해야 할 민주화의 과제가 있었고, 직선제 개헌 이후에도 남아있던 이른바 '앙시엥 레짐'과의 최후의 결전이 다가왔다고 모두가 믿었던 그런 때가 있었다.

지금이라고 해서 앞서 나열한 문제들이 해결되거나 해소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전히 우리는 저러한, 혹은 저기에 언급되지 않았지만 예전부터 지금까지 한국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문제들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그런 때가 있었다. 저 문제들을 문제로 똑바로 바라보고,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당위를 향해 나아가자고 다른 이들을 설득하는 일이, 지금처럼 어색하고 머쓱하지 않았던 그런 때가, 루카치가 말하는 '별'이 하늘에 떠있어서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그런 때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자면, 루카치가 말하는 '별'은 공산주의 혁명의 텔로스이고, 밤하늘에서 유일하게 움직이지 않는 북극성을 가리킬 것이다. 전략적으로 돌아갈 수는 있지만 결코 포기할 수는 없는 궁극의 목표를 뜻할 터이다. 그럼에도 저 비유는 너무도 아름답고, 시적이며, 어떤 식으로건 세상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고자 하는 이들에게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강한 영감을 준다.

1990년대의 어느 날 밤, <미학 오디세이>의 원고가 되었을지 모를 글을 쓰다가 밤하늘을 바라본 청년 진중권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속으로 나직하게 저 문장을, 어쩌면 그가 능통한 독일어로 읊었을지 모르겠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책을 쓰며 지새우던 밤. 자판기 커피를 뽑으러 나와서 올려보던 하늘의 희미한 별들만 기억에 남아 있다. 여느 '386 세대'처럼 당시 나도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을 내적으로 방어하던 중이었다. 거의 10년 동안 나를 지탱해주던 하나의 신념체계가 무너졌다. ('작가의 말',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작가 노트>(휴머니스트 펴냄, 2004년))

<미학 오디세이>는 이렇듯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충격 속에서 잉태되고 있었다. 청년 진중권 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에게 역사의 종착점, 텔로스 노릇을 하던 사회주의가 거대한 역사적 실험 끝에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 민주 공화국, 즉 동독이 서독에 흡수통일된 것은 1990년, 소비에트 연방이 몰락한 것은 1991년, 진중권이 <소비에트 연방의 유리 로뜨만의 구조기호론적 미학 연구>로 미학 석사 학위를 받은 것은 1992년, 독일로 유학을 떠난 것은 1993년의 일이었다.

▲ 2011년 반값 등록금 공약 이행을 촉구하는 촛불집회 현장에 나온 진중권. ⓒ프레시안(최형락)

2.

박사 학위를 따지 못한 상태로 국내에 돌아오게 된 1999년까지, 진중권은 독일에서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을 사귀고, 아내를 만나 결혼도 하고, 심지어 애도 낳았다.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 중 안 그런 사람이 별로 없긴 하지만, 진중권 역시 자신의 유학 시절을 즐겨 곱씹고 다양한 방식으로 칼럼 등에 인용하며, '한국사회'의 문제를 마주쳤을 때 판단의 준거로 삼는다.

이것은 단지 그가 '선진국'에 유학을 다녀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선진국 중에서도 구 동독의 한복판에 있던 베를린 자유대학을 다녔기 때문일 것이다. 스탈린주의로 악명이 높았던, 문화적으로 그리 별 볼 일 없던 소련이 아니라, 동구권 국가 중 가장 선진국이었던 동독이 서독에서 쏘아 보내던 TV 전파 때문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을 때, 진중권은 실로 큰 충격을 받았다. 진중권이 1991년이 아니라 "1989년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줄줄이 몰락하는 것을 본 후, 약 1~2년간의 숙고 끝에 공산주의라는 '주의'를 포기"(<생각의 지도>(천년의 상상 펴냄, 2013년), 171쪽)했다는 말은 연도를 잘못 표기한 게 아니다. 진중권의 머릿속에서 공산주의는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그날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 내 생각은 우리가 1980년대에 '유로코뮤니스트'라 비웃던 서유럽 사민주의 쪽으로 기울었다. 유학을 통해 동서독 체제를 비교할 기회를 가졌던 게 계기였다. 트라비(Trabi)를 타고 연 30일 휴가를 보내는 동독의 노동자와 폭스바겐(Volkswagen)을 타고 연 40일 휴가를 보내는 서독의 노동자. 어느 쪽이 더 사회주의적일까? 당시에 접한 소련-스웨덴의 비교연구도 이른바 사회주의적 가치의 모든 측면에서 외려 스웨덴 사회가 소련보다 우월함을 보여주었다. (같은 곳)

진중권은 공산주의의 최고 선진국 동독에 가고 싶었지만 베를린 장벽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였다. 베를린 장벽의 가짜 잔해를 판매하는 기념품 상인들만이 주위를 맴돌던 그런 시절이었다. 독일에서 비트겐슈타인과 발터 벤야민을 공부하고, 유럽을 두루 돌며 관광하고, 친구들을 사귀고, 그 중 한 친구와 연인을 넘어 부부로 발전하고, 아들을 낳고, "교포 자녀들에게 한국말을 가르"(<호모 코레아니쿠스>(웅진지식하우스 펴냄, 2007년), 181쪽)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진중권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사민주의자'가 되어서 한국 땅을 다시 밟은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3.

▲ <시칠리아의 암소>(진중권 지음, 다우출판사 펴냄). ⓒ다우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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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혹은 '장기 20세기'가 시작되던 무렵, 독일에서 돌아와 조국의 문제와 싸우기 시작한 진중권은 숱한 명문을 흩뿌리기 시작했는데, "별자리 진보"도 그 중 하나다. 이 텍스트가 주는 진한 울림은 저 루카치의 메타포 아래에서 온전히 이해 가능하다. 만약 <소설의 이론>의 서문을 모른 채 "별자리 진보"를 접했던 사람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저 위에 인용된 문장을 음미한 후, 다음 인용문을 읽어보도록 하자.

최근 시민단체들의 활동을 바라보며 나는 별자리를 생각한다. 암울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깜깜한 사회, 거기에서 갖가지 이름의 별들이 서로 연결되더니 별자리를 만들어낸다. 까만 밤하늘에 갑자기 나타난 별자리, 나는 거기에서 미래의 희망을 본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인 결사체. 그것은 별자리를 닮았다. 시민연대는 총선이 끝나면 별자리를 해체하고 다시 별들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다가 일이 생기면 따로따로 빛나던 별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또다시 새 별자리를 짜고, 그러다가 또 흩어지고……. (<시칠리아의 암소>(다우출판사 펴냄, 2000년), 64쪽)

물론 이것은 루카치의 비유와 1:1로 대응되지 않는다. 루카치가 말한 '별'은 역사의 텔로스, 공산주의 혁명이지만, 진중권은 "자유로운 개인"들 각각이 '별'이 되자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루카치의 '별'이 목적어라면 진중권의 '별'은 주어다. 루카치는 '별'을 통해 모든 이에게 보편적으로 타당할 수밖에 없는 목적지를 가리키고자 한다면, 진중권의 "별자리 진보"는 한시적이고 임의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개인들의 창발적 연대를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두 텍스트를 잇는 거대한 정서적 끈을 감지할 수 있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진보'에의 희망을 품는 지식인의 선량한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는 것이다. 1993년 독일로 훌쩍 떠났던 진중권이, 귀국하여 대표적인 '안티조선' 논객으로 활약하던 그 시절의 분위기는 아무튼 그랬다. 단 하나의 북극성이건, "밤하늘에 그려져 있으면서 동시에 그려져 있지 않"(63쪽, 같은 책)은 별자리이건, 어쨌건 '우리'는 별을 바라보고 있었고 이 캄캄한 밤을 헤치고 신중하게 한 걸음씩 전진하고자 했던 것이다.

왕년의 운동권 진중권은 당시 활발히 진행되고 있던 진보정당운동에 관심을 보였다. 1997년 대선에 노동자 후보를 내기 위한 운동이었던 국민승리21이 명맥을 이어가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되었다. 민주노동당은 진지하게 대선에 임하고 총선에서 의석을 획득하여, 현실 정치를 통해 현실에 개입하고자 했다. '혁명의 전초기지'를 만들려는 게 아니었다. 그때까지 진보진영에서 이른바 '부르주아 정당'이라고, 자본가들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아냥거리기 바빴던 의회정치에 직접 뛰어들어 구체적인 변화를 이루어내기 위한 시도가 벌어지고 있었다.

진중권이 계간 <사회비평> 2002년 여름 호에 기고한 '적, 녹, 흑: 진보정당을 중심으로'는 바로 그 당시의 문제의식을 고스란히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역작이다. 별도의 단행본으로 편집된 바 없지만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바로 찾을 수 있을 만큼 널리 퍼진 이 글에서, 진중권은 당시까지의 진보 운동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 21세기에도 생존이 가능한 세 가지 이념을 추려내어, 사민주의와 생태주의와 무정부주의(즉 자율주의)를 진보정당 운동의 고갱이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런데 당연히, 한 사람이 완전한 사민주의자이면서 생태주의자이고 동시에 무정부주의자일 수는 없다. '적, 녹, 흑'의 이념이 진보정당 안에 구현되기 위해서는, 그 각각의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구해야 할 공동의 선을 구현하기 위한 조직을 형성해야 한다. 즉, '별자리 진보'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약간의 시간적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러므로 저 두 텍스트는 서로 상보적으로 독해될 수 있다. 총선연대 뿐 아니라, 안티조선이 됐건 진보정당 운동이 됐건, '역사의 텔로스', 혹은 북극성을 상실한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열심히 각자의 빛을 뿜어내고, 별자리를 형성하며, 또 그 별자리를 읽어냄으로써 스스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한 걸음씩이라도 진보를 이룩해 나가는 것이다. 비단 진보정당 운동이 아니어도,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어떤 이념이 허락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민주의, 생태주의, 무정부주의의 느슨한 결합 정도일 것이다. 진중권은 그러한 꿈을 꾸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활자 매체와 인터넷을 가리지 않고 엄청나게 많은 글을 쏟아 부었다.

4.

▲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진중권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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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폭풍의 세월을 어느 정도 보내고 난 후, 자신이 쓴 글 중 단행본이 될 만한 것들을 골라 묶던 진중권은 문득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박정희 망령은 물러갔고, <조선일보>는 제 몫을 찾았고, 한나라당은 몰락했고, 민주노동당은 정치적 진출에 성공했다. 모든 게 내가 원하던 대로 된 셈이다. 그런데도 까닭 없이 느껴지는 이 허탈함의 정체는 뭘까?"(머리말, <빨간 바이러스>(아웃사이더 펴냄, 2004년))

2013년 5월 현재 이 문장을 보면 "모든 게 내가 원하던 대로" 되었다는 등의 소리를 언뜻 이해하기 어렵지만, 진중권이 저 글을 쓰던 시점이 2004년 6월이라는 것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2004년 4월 15일 실시된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원내 야당으로 전락하고, 신생 여당 열린우리당이 탄핵 역풍을 타고 과반수 의석을 획득했다. 정당투표제가 도입되면서 민주노동당이 비례대표에서 무려 8석을 얻어, 지역구의 2석을 합쳐 총 10석으로 심지어 구 민주당도 앞지르며 원내 3당이 되었다. 선거 과정에서 기존 언론의 영향력을 뛰어넘(는 것처럼 보이)는 인터넷의 활약이 도드라진 것은 물론이다.

하여 진중권은 선언한 것이다. '다 이루었다.' 심지어 그는 "4월 15일, 당사에서 울려 퍼지는 환호성을 들으며 [나는] 4년 동안 견지해 왔던 이 당에 대한 지지를 비로소 접을 수 있었다."(같은 곳)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고, 진중권은 계속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진보정당과 정치에 대한 이야기들을 쏟아냈지만, 2004년 이후에 출간된 책들의 목록을 통해 그의 정치적 입장의 변화를 더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2004년 6월 출간된 <빨간 바이러스>의 다음 책은 2005년 3월에 나왔다. 그 제목은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휴머니스트 펴냄, 2005년)이었는데, 본문에는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이 책은 그가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원고를 묶어서 만든 것이었다. 안티조선운동이 <조선일보>를 넘어 '조중동'에 대한 포괄적 거부로 나아갔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을 만도 했지만, 앞서 말했듯이 당시는 모두가 묘한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던 시기이기도 했고, 책 그 자체가 사회적 이슈에 대한 칼럼집이 아니라 미학을 다루는 것이기에 그리 큰 논란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은 한 공공 지식인(Public Intellectual)으로서 진중권의 이력에 중요한 기점이 된다. 한국 사회를 향해, 뭔가 '돈벌이'가 될 수 있는 방향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최초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 직전에 출간된 책의 제목이 <빨간 바이러스>였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하고 보니 더욱 역설적으로 느껴지지만 아무튼 사실이 그렇다.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은, 1인칭 전지적 진중권 시점으로 말하자면, 스마트폰 시대를 선취한 책인 것이다. 진중권의 말을 그대로 옮겨보자. "드디어 상상력이 힘이 되는 시대가 왔다. '상상력의 혁명'은 이미 시작되었다. 미래의 생산력은 상상력이 될 것이다."('상상력 혁명',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상상력이 힘이 되는 시대"라는 문구에 등장하는 "힘"은, 뒤따라 이어오는 "미래의 생산력"에서 말하는바 '생산력'이며,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돈으로 수렴하게 된다. 물론 마르크스가 살아서 돌아온다고 해도 우리는 경기침체보다는 경제성장을 택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적, 녹, 흑"의 저자가 '놀이, 예술, 상상력'을 통해 "미래의 생산력"을 증진해야 한다고 말하는 광경을 목격하는 것은 어쨌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로써 진중권은 '정치'를 경유하지 않고, 곧장 '사회'를 향해 발화할 수 있는 지점을 획득했다. '우리는 우리의 상상력을 키워서 미래의 성장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미학적이면서 동시에 경제적인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놀이'와 '상상력'을 강조함으로써, 이른바 '구시대적 좌파'들과 한층 더 확실하게 선을 그을 수 있게 된 것도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공장 노동자 중심의 노동운동에만 집착하는 겁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기 위한 이론적 초석을 다져놓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 표명을 함부로 '우경화'라고 부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진보 혹은 좌파야말로 전통적으로 기술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상력'을 자신의 주요 화두 중 하나로 삼는 것이, 그가 즐겨 인용하는 벤야민의 말마따나 "유행하는 책을 유행이 지난 후 읽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2009년 <괴짜 사회학> 출간 기념 공개 대담에 참석한 진중권. ⓒ프레시안(최형락)

5.

총선 결과를 본 후 본인이 추구했던 사회적 목표들이 전부 완수되었음을 확인하고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을 쓴 진중권의 판단은, 당시로서는 타당했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그때까지만 해도, 남은 3년 반 가량의 시간이 얼마나 스펙터클할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억력이 부족한 독자를 위해 진중권의 타임라인에서 중요하게 지적되어야 할 두 가지 사건만을 언급해보자. 본인이 수십조 달러의 가치를 지니는 연구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던 한 과학자가 있었는데, 그 연구 결과라는 것이 포토샵을 이용한 사진 조작에 지나지 않음이 드러났다. 또한 본인이 수백억 달러의 흥행을 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던 한 영화감독이 있었는데, 그 영화가 개봉하고 나니 수많은 관객들이 극심한 재미없음과 당혹감을 호소하며 극장 문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 <첩첩상식>(진중권 지음, 새움 펴냄). ⓒ새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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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는 황우석 사건을, 후자는 심형래의 <디 워> 개봉을 둘러싼 논란을 다소 장황하게 늘여서 써본 것이다. 황우석 사건은 진중권의 내면에 심대한 충격을 주었고, 그렇게 비틀거리던 그는 <디 워> 사태를 통해 훗날 '촛불 스타'로 떠오르게 될 초석을 닦았다. 두 사건 모두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대중의 열광이 드러났는데, 전자는 진중권이 "지금 나는 썩어가고 있다"(<첩첩상식>(새움 펴냄, 2006), 17쪽)는 쓰라린 자기 선언을 하게 그를 몰아붙인 반면, 후자는 그의 이름을 대중적으로 알리고 사상 최초로 대중들에게 "횽(형)" 소리를 듣는 지식인이 되게 만들었다.

일단 2005년 말부터 2006년 초까지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황우석 사건으로 먼저 들어가 보자. 진중권에게 결정타를 안긴 것은 2006년 4월 24일 벌어졌던 이른바 '감금 사건'이 아니었다. 그가 경남 창원대학교에서 강연을 하고 나오려는데 황우석의 지지자 30여명이 들이닥쳤고, 4시간가량 옴짝달싹 못하도록 강의실을 봉쇄하고 있었던 그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중권 본인의 설명을 들어보자.

내가 진짜 상처를 받은 것은 그때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이었다. 거의 모든 국민이 황우석을 신봉하고, MBC의 광고를 끊어버리고, 황우석 비판자들에게 집단적으로 언어적 폭력을 가하던 상황. 솔직히 그때 무서웠다. 이른바 '노빠'와 '박빠'가 '황빠'로 뭉쳐서 함께 퍼붓는 애국적 언어폭력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가공할 수준이었다.

웬만한 욕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나지만, 그때 퍼부어진 욕은 내적으로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입은 심리적 상처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후유증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우리 프로그램의 청취자 게시판에 올라온 욕설 중에는 나와 절친했던 학교 후배가 제 실명을 걸고 써놓은 것도 있었다. 도대체 사람들이 왜 갑자기 이상해진 것일까?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내 주변의 사람들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첩첩상식>, 16쪽)


6.

"혹시 국민성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호모 코레아니쿠스>(웅진지식하우스 펴냄, 2007년), 9쪽)

황우석 사건을 취재하던 일본 방송사 PD가 진중권에게 던진 질문이라고 한다. 물론 그 자리에서는, '민족성', '국민성' 등의 개념을 거론조차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독일식 사고방식의 소유자답게 "국민성 같은 게 실재한다고 믿지 않는다"는 답을 돌려주었지만, 저 질문이 진중권의 뇌리에 오래 남아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어쨌건 그에게 있어서 "황우석 사태는 이 이념의 대립 너머에 존재하는 분열의 새로운 차원"에, "이념보다 더 깊은 차원의 대립, 한마디로 서로 다른 인성의 대립"(같은 책, 109쪽)이 존재함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2006년 무렵의 인터뷰 기사 등을 짚어볼 때, 그 무렵부터 진중권은 월터 옹이 만들어낸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대립구도를 적극적으로 차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마 진지하게 미디어아트 등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월터 옹, 마샬 맥루한 등을 (다시) 읽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월터 옹이 만들어낸 저 개념이 대단히 유용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특히 황우석 사태와 같이 기존의 개념 틀로 해석이 안 되는 사태를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진중권에게는 차라리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그는 <호모 코레아니쿠스>를 출간하기 전, 2006년 6월경에 논객으로서 절필 선언을 했다. 이후 또 절필 선언을 하기 때문에 이것을 '1차 선언'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1차 선언'이 이루어진 곳은 그와 다른 진보 논객들이 자주 칼럼을 연재하던 <씨네21>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코너였다. 그는 "이제는 규범을 말하고 지키는 논객이 아니라, 그냥 사실을 기술하는 기록자나 허구를 늘어놓는 이야기꾼이고 싶다"며, 라디오 진행자를 그만두고, 정치·사회적인 의견을 게시하기 위한 지면을 반납하고, 한국인을 한국인으로 만들어버린 아비투스(습속)가 무엇일지 고민하며, 비행기 조종을 배우기 시작했다.

<호모 코레아니쿠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출현한 책이기 때문에,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만큼이나 그의 오랜 독자들에게는 다소 뜬금없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몸은 한국에 살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독일에 있던 진중권이, 심지어 술에 취하면 영어 불어 독어로 술주정을 한다는 믿기 어려운 전설이 나돌기도 하는 그 진중권이, 갑자기 이 무슨 한국인 타령이란 말인가. 그와 오래전 틀어졌을 뿐 아니라 사실 글 쓰는 방식과 성향 등 많은 부분에서 다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점까지 꾸준히 같이 거론되고 비교되었던 강준만이 2006년 <한국인 코드>라는 책을 냈다는 사실 때문에 더더욱, <호모 코레아니쿠스>는 이상해 보였다.

앞서 우리는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이, 이전까지 진중권의 글을 읽어오던 이들에게 의아한 기분을 안겨주는 책이라고 확인했다. 그런데 <호모 코레아니쿠스> 역시 그랬다. 특히 전자보다 후자가 안겨주는 이질감이 매우 컸다. 비록 그 내용을 뜯어보면 '신체'에 대한 현대철학의 논의를 검토하는 것이 절반, 그 논의들을 적용해볼 수 있는 현대 한국 미술 작가들의 작업을 검토하는 것이 절반 정도지만, 애초에 제목과 주제가 '한국인'으로 잡힌 책을 낸다는 것은 당시의 진중권이 거느리고 있던 독자들이 아는 '그 진중권'이 할 행동은 아니었던 것이다.

두 개의 오답을 합친다고 해서 하나의 정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이 경우에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호모 코레아니쿠스>를 통해 진중권은, '앞으로는 이걸 밀어야지'라고 점찍어둔 '구술문화 대 문자문화'의 구도를, 앞으로 자신의 독자가 되어줄 한국인들에게 과감하게 적용했다.

한국의 선진적인 인터넷 인프라는, 역설적이게도 역사적 후진성의 덕분이다. 한국의 경우 해방 직후 문맹률이 90퍼센트에 달했다고 하니 문자문화로 진입한 지 채 60년이 안 된 셈. 당연히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구술문화의 습속이 강할 수밖에 없다. 물론 산업화, 도시화 과정에서 한국인들 역시 급속히 익명화, 원자화되어갔다. 하지만 오랜 촌락공동체 생활에서 형성된 인격적 접촉의 열망까지 사라지기에는 그 시간이 너무 짧았다. 사라져가던 촌락공동체 문화는 인터넷을 만나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는다. (같은 책, 192쪽)

▲ <호모 코레아니쿠스>(진중권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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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한국문화사 서술은, '구술문화'를 '전근대'로, '문자문화'를 '근대'로 치환하고 읽으면, 근대성을 획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포스트모던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기존의 담론과 사실상 거의 다를 바가 없다. 이른바 '압축적 근대화'로 인해 제대로 된 근대를 형성하지도 못했고, 그 상태에서 다시 포스트모던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어서, 그 두 단계를 모두 착실히 밟은 서양 사회에서 모두 거쳐 간 문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온다는 그런 종류의 진단 말이다.

하지만 단어를 바꿈으로써 얻게 된 것이 없지는 않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다음에는 '영상문화', 혹은 '디지털문화'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은 바로 그 구술문화적 성격으로 인해 인터넷 보급률이 순식간에 높아졌고, 따라서 문자문화 단계에 오래 머물러있는 다른 서구권 국가에 비해, 비록 문자문화 자체는 부실하기 짝이 없지만, 다음 단계로 비교적 빨리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자문화에 밀려 사라졌던 영상문화와 구술문화가, IT(정보기술)에 힘입어 문자문화의 이후에 다시 주요한 소통매체로 되돌아오고 있다. 아직 문자문화가 충분히 무르익지 못한 후진성이 외려 문자문화 '이후'를 만들어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잔혹하기 짝이 없었던 역사가 한국에 보여주는 약간의 공정함이랄까? (같은 책, 187쪽)

그런데 앞서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에서 패기 있게 선언된 바와 같이 21세기는 상상력이 곧 경쟁력인 시대다. 우리에게 문자문화가 부족한 대신 문자문화 '이후'를 만들어갈 원동력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이 단지 '영상문화' 차원에서가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앞서나갈 가능성이 생긴다는 말이 된다.

2006년에서 2007년 사이 진중권이 구체적으로 표현해낸 '영상문화-상상력'의 논의 구조는 상당히 건설적이고 발전적이며 미래 지향적이기도 하다. 그를 단지 '모두까기 인형'이나 tvN의 <SNL 코리아>의 '진중건'처럼 오직 네거티브한 논의만을 펼치고 남을 깎아먹기 급급한 누군가로 치부하는 이들의 생각과 달리, 진중권의 머릿속에는 한국 사회가 어떤 형태를 띠고 굴러가야 할지에 대한 대략적인 큰 밑그림이 들어있는 것이다.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위에 <호모 코레아니쿠스>를 포개보면, 기왕 넘어가버린 영상문화를 긍정하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폐단을 모두 피해가는 그런 사회가 보인다. 그 영상문화의 힘으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백범 김구 선생이 꿈꾸었던 높은 문화의 힘을 갖추고, 그것을 바탕으로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하여 높은 소득도 올리는 그런 나라의 청사진이 나오는 것이다.

동시에 미디어아트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진중권 본인도 이제는 거리낌 없이 포스트모던의 원리를 자신의 글쓰기와 삶에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이라고 안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심리적 장벽이 이론적 근거를 통해 제거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적어도 '우리 포스트모던 똑바로 하자'보다는, '우리 영상문화 시대에 올바르게 적용해보자'가 좀 더 그럴듯한 말처럼 들리는 것이다.

7.

문제는 이번에도 진중권이 유행 지나간 책을 늦게 읽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좀 많이 늦었다는 데 있다. 영상매체와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함께 던지면 <쥬라기 공원>이 떠오를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영화 한 편이 올린 수입이 우리나라에서 자동차 몇십만 대를 수출한 것과 같다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난다면, 당신은 나와 비슷한 연배거나 더 나이가 많은 사람이다. 문화적 상상력으로 높은 수입을 올린다는 발상 자체만큼은, 전혀 상상력과는 무관한, 일종의 클리셰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 심형래 감독의 <디 워>. ⓒ영구아트무비

그 클리셰를 가장 진지하게 실천에 옮기고 있던 사람이 바로 심형래였다. <디 워>를 만든 바로 그 심형래 말이다. 진중권이 2006년에 이르러서야 '상상력이 곧 경쟁력'이라고 말하기 시작할 때, 심형래는 <쥬라기 공원>을 보자마자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오래도록 공룡 특촬물을 만들며 근성 있게 기술을 갈고 닦은 끝에, 김대중 정부에 의해 '신지식인 1호'로 선정되었다.

그러므로 <디 워> 논란은,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이런 것이다. 어떤 이론가가 주창하기 시작한 것을 진작부터 실행에 옮기고 있던 한 창작자가 있다. 그런데 그 창작자의 결과물을 보고, 이론가는 진저리를 내며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소리를 외치기 시작한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지만, 마법소녀의 주문 같기도 하고 뭔가 묘한 매력이 있다고 느낀 대중들은 이론가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하며, 이론가는 기존의 독자층을 벗어나 대한민국 최초로 자신을 '횽'이라고 부르는 일군의 팬 집단을 거느리게 된다.

물론 심형래라는 한 창작자가 내놓은 결과물이 후지다고 해서, 창조성이 곧 경쟁력이라는 진중권의 테제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심각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런데 2007년 9월 14일 <디 워>가 개봉하던 그날까지, 진중권이 제시한 창조성과 상상력으로 경제적 드라이브를 거는 모델을 가장 잘 실행하고 있던 사람이 심형래였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칸트의 말처럼, 개념 없는 직관은 공허하고 직관 없는 개념은 맹목적이다. 진중권은 스티브 잡스가 '붐' 하면서 꺼내들었던 아이폰이 국내에 정식 출시되고 성공하기 전까지, 마음 편하게 어떤 사례를 지칭하며 '내가 말하는 상상력이 힘이 되는 경제는 이런 거지, 하하'라고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난점을 제하고 나면, <디 워> 논란은 진중권의 인생에 역전의 기회를 제공해줬다고 말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디 워>의 스토리를 설명하기 위해, <100분 토론>에 출연했던 그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고전적인 서사의 개념을 들이밀었고, 그것이 아직 트위터나 페이스북이 국내에서 활성화되기 전 주로 '디시인사이드'에 모여 있던 '잉여' 청년들의 감수성에 제대로 꽂혔다. 진중권은 본인 스스로가 '소스'가 됨으로써, 텍스트가 아니라 이미지로 사유하는 새로운 신체를 가진 '호모 코레아니쿠스'들이 존재함을 입증한 것이다.

▲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외치는 진중권 짤방.
이 '짤방'을 독해해보자. 진중권의얼굴을, 당시 교황이었던 베네딕토 16세의 몸에 대충 합성하고, 위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써놓았다. 여기서 우리는 대략 세 가지 사실을 즉각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

(1) 이 짤방을 만든 사람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무슨 뜻인지 모르고, 딱히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2) 이 짤방을 만든 사람은 그러나, 하필이면 교황과 진중권을 합성했다는 것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그 말이 어느 정도 권위 있(어 보이)는 표현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다.
(3) 그런데 누군가 그런 말을 하면 아무튼 웃겨 보인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합성은 '발로 한' 것처럼 낮은 퀄리티로 이루어져 있다.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 이행하고, 문자문화에서 다시 영상문화로 이행하는데, 심형래처럼 구술문화적 힘을 이용해 영상문화에서 한몫 잡으려는 사람을 한 차례 걸러내 보자. 그러면 이렇듯 문자문화가 요구하는 지적 능력이나 교양은 부족한 상태로, 다만 보고 느끼는 대로 표현하는 네티즌이 나온다. 그런데 이 네티즌이라는 것은, 1999년 귀국한 이후 진중권이 신물이 나도록 상대해온 바로 그놈들이다.

영상문화는 이미 와 있었다; 다만 돈이 되지 않았을 뿐이다.

8.

진중권이 진저리를 내건 말건 <디 워>는 국내에서 흥행에 성공했다. 마찬가지로, 진중권은 그러한 결과를 전혀 원치 않았겠지만,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2004년 총선 이후 '역사의 종언'을 보고, "모든 게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고 생각하며, 근대적 기준만을 고집하지 않고 탈근대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사회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재주조해낸 진중권은 다른 여느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센 보수화에도 불구하고 다음 선거에서 한국 유권자의 '38.6퍼센트가 중도적인 정부를 원했고, 다음으로 34.2퍼센트가 진보적이기를, 20.1퍼센트는 보수적이기를 바랐다'고 한다.(<시사저널>, 2006/10월/03) 하지만 '누가 가장 진보적인 후보냐'는 설문에 '이명박'이라고 대답하는 게 한국의 정치 상식이니, 이런 설문에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같은 책, 177쪽)

▲ <생각의 지도>(진중권 지음, 천년의상상 펴냄). ⓒ천년의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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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진중권 본인은 한국에 구술문화만 충만하고 문자문화는 부족하다고 말했지만, 본인이 다소 '포스트모던'한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은, 어쨌건 예전에 비해 구술문화가 아닌 문자문화적 요소가 늘었다는 낙관적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우리의 조국은 언제나 우리의 눈높이를 훌쩍 뛰어넘어, 대중은 '가장 진보적인 후보'라는 단어를 들으면 '이명박'을 떠올렸다. 반면 그 이명박에 맞서 선거를 해야 할 민주당, 아니 대통합민주신당은 내부 계파 싸움으로 분열되어, 이른바 '친노' 계열은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고, 그 와중에 내세워진 후보는 17대 총선에서 '노인 발언'으로 잘 나가던 선거에 큰 위기를 불러왔던 정동영이었다. 그 정동영이 얻은 득표수는 고작 600만 표 가량으로, 이는 <디 워>의 관객 수인 780만에도 못 미치는 것이다.

사회가 한 발자국, 혹은 반 발자국이라도 '모던'으로 향할 것이라는 믿음 하에 '포스트모던'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더니, 대한민국은 더더욱 현란한 탈근대의 경지로 훌쩍 뛰어 들어간 것이다. 100명이나 읽을까 말까한 미학 책을 쓰고 싶다는 진중권의 삶은 그 이후로 더욱 바쁘고 정신없고 바람 잘 날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2008년 촛불시위, 그는 '아프리카 TV'로 생중계되는 시위 현장에서 진보신당의 <칼라 TV> 리포터가 되어 체스를 두는 자동인형이 되는 체험을 한다. 그 과정에서 대중적 인지도와 인기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진중권이 촛불시위 당시 누렸던 인기는 향후 그 어떤 지식인도 쉽게 넘볼 수 없는 그런 것이다. 본인이 설명하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요소가 결합된 영상문화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이 진중권이다. 열정적으로 뛰어다니지만 기본적으로 몸에 밴 예의가 바르기 때문에 마땅히 흠 잡을 구석이 없자, 일군의 노인들이 그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고 '담배 똑바로 피우라'고 훈계를 했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대립이다. 그러자 그 상황이 녹음된 소리를 듣고, 모든 것을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영상문화의 네티즌들은 '진중권 담배 송'(바로가기☞)을 만들어 화답했다. 이렇게 철저히, 자신이 대중에게 소개한 이론이 자신을 통해 육화되는 것을 경험한 지식인이 또 있을까 싶다.

그런데 너무 잘 나간다 싶었다. 그러더니 그를 겸임교수로 임명하고 있던 중앙대학교에서 문득 진중권을 해고해버렸다. 더 이상 국내에서 버티기 힘들겠다는 판단을 한 그는, 기왕 배우기 시작한 비행기 조종을 완벽하게 만들 겸, 영어 회화도 익힐 겸, 필리핀 항공학교에 등록을 하고 3년을 기한으로 잡아 출국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가 관심을 갖지 않아도 상대편에서 집착하는 누군가에 의해 제기된 소송들이 얽혀있었고, 그로 인해 꾸준히 재산과 체력과 정신을 갉아 먹히게 된다.

결국 본인이 꿈꿨던 것처럼 3년을 다 채우지 못한 채 진중권은 한국에 돌아왔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몇몇 미학 서적을 출간하고, <씨네21>에 연재했던 철학적 에세이들을 모아 <아이콘>(씨네21북스 펴냄, 2011년)이라는 제목으로 묶어서 내고, 꾸준히 비행기 연습을 하며 필리핀 사람들이 즐겨 먹는 '발롯(balut)'을 음미하며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를 곱씹었다. 뇌물수수 혐의로 교육감 직을 상실하게 된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다, 다시 한 번 논객을 그만두겠다며 '2차 선언'을 했지만, 대선을 앞두고 한국에 들어오기까지 한 이상 계속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12월 19일, 즉 대선 당일까지만 하겠다는 한시적 조건을 걸고, 진중권은 다시 한 번 논객으로서 시동을 걸었다.

9.

▲ <아이콘>(진중권 지음, 씨네21북스 펴냄). ⓒ씨네21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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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싸움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진중권은 트위터 계정을 만들었고, 특유의 순발력과 언어감각 및 기존의 인지도로 인해 이른바 '파워 트위터리안'이 되어 대선 정국에 개입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쌓여가는 트윗만큼이나 숱한 '흑역사'를 적립했는데, 그 모든 내역을 일일이 기입하기에는 이 지면이 모자란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의 정치적 판단만을 기억해보기로 하자.

대학에 들어가 운동권이 된 후 진중권은 단 한 번도 NL, 그 중에서도 특히 주사파와 가까워진 적이 없었다. 현재 확인 가능한 그의 텍스트에서 주사파가 긍정적으로 묘사된 경우는 없다. 이것은 단지 대학 시절 운동권에서 조직이 달랐다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특히 독일 유학을 기점으로 내면의 근대화를 이룩한 그는 북한을 한국의 대안으로 여기며,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신처럼 모시고, 온갖 유교 봉건적 습속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는 주사파와 도저히 가까워지려야 가까워질 수가 없는 사이인 것이다.

2012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진보정당 간 이합집산이 극심해졌다. 민주노동당은 이미 주사파에게 점령당한지 오래였고, 자신들이 일궈놓은 정당을 빼앗긴 이들은 탈당을 하여 진보신당을 만들었다. 한편 남아있던 민주노동당 다수 세력은 구 민주당 계열에 정착하지 못하고 튕겨져 나온 유시민의 '국참계'와, 진보신당에서 탈당한 심상정, 노회찬 등과 손을 잡고 통합진보당을 창당했다. 그것이 2011년 12월의 일이다.

바로 그렇게 만들어진 통합진보당에서 총선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경선을 진행하는데, 그 과정에서 관악을 선거구에 출마한 이정희 의원 측이 모바일 투표에 나이와 성별 등을 속이고 참여하라는 문자를 보낸 사실이 발각되었다. 이정희 의원은 구 민주노동당 출신으로 이른바 '주사파'로 간주되는 인물이었다.

진보정치는 옳은 결과도 중요하지만 정당한 과정을 통해 획득되어야 한다고 늘 주장해왔던 진중권은, 게다가 그 부정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이 이른바 '주사파' 계열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우호적으로 이정희 측을 감싸고 나섰다. 이정희와 상대방인 김희철이 재경선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이정희가 경선 과정에서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의혹을 받았고, 그 증거가 당시로서는 명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중권의 뜻은 한결같았다. 원래 NL은 도덕성을 무기로 삼는 자들이 아니니, 이 이상을 기대하기는 어렵고, 재경선을 하는 것으로 충분한 벌이 된다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진중권의 이러한 발언은 그의 오랜 독자, 혹은 팬 층을 실망 내지는 충격에 빠뜨렸다. 사실 그의 취지가 무엇인지는 모를 수가 없다. 부정경선을 하다가 적발되었는데 재경선을 하라는 것은, 커닝하다 들켰는데 재시험을 보게 해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만약 또 다른 진중권이 보고 있었다면 반드시 지적했을 것이다. 다만 '파워 트위터리안'이 된 진중권은, 야권연대가 깨지고 선거 결과 형편없이 패배하는 것만은 막고 싶었을 따름이다.

이후 대선 과정에서 보인 모습 역시, 놀라우면서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는 문재인과 안철수의 단일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단일화가 되지 않으면 통합진보당의 후보인 심상정을 찍겠다는 취지의 트윗을 올렸다. 강준만과 유시민이 그 어떤 식으로 공격하고 회유해도 넘어가지 않고 민주노동당의 깃발을 지키던 그 진중권이 아니었다. 어차피 구 민주노동당 자체가 형해화된 상황이긴 했지만, 그 다음의 진보적 가능성을 모색하는 대신, 진중권은 12월 19일 선거 이후에는 아예 세상이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단일화와 정권교체라는 한 가지 이슈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진중권은 스스로 선언한 논객으로서의 마지막 날을 맞았고, 그가 그토록 헌신적으로 선거운동에 나섰던 '야권'은 패배했다.

10.

▲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진중권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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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던 글쓰기는 이런 게 아니었다."('들어가는 말', <시칠리아의 암소>(다우 펴냄, 2000년)) 본인이 원치 않게 청탁을 받아 쓴 정치적 글을 모아 책으로 엮으면서, 진중권이 저자 서문에 내놓은 첫 문장이다. 그에 따르면, "원래 내가 생각하던 글쓰기는 '책'을 쓰는 것이었"지, 이렇게 구성도 안 되고 다만 대충 그러모아서 주제별로 묶어놓는 것이 최선인 그런 글을 쓰는 게 아니었다는 말이다.

진중권은 술회한다. "요즘은 가끔 삶이 우연에 의해 지배된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이런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독일에 있을 때 받은 어떤 원고 청탁에서 비롯한 것이다."(같은 곳) 그 원고 청탁은 아마도, 이인화가 편집위원으로 있었던 잡지 <상상>에서 '악마주의'에 대해 원고를 써달라고 했던 그것일 터이다. 진중권은 열심히 원고를 준비했는데, 알고 보니 그 원고는 이인화가 박정희를 '낭만주의적 악마'로 묘사하기 위한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기왕 원고를 쓴다고 했으니 쓰되, 반론할 수 있는 지면도 요구했고, <상상> 측에서도 허락했다.

그런데 이인화의 심기가 불편했던지 진중권의 원고는 아예 실리지도 않았고, 대신 그것을 고스란히 살려 <문학동네>에 기고했는데, <조선일보>를 비판한 문단이 삭제된 채 글이 실렸다. 한 번은 쓰게 웃고 넘어갔는데, 비슷한 주제로 쓴 다른 글이 거부당하자, 진중권은 <조선일보>를 겁내지 않는 언론을 찾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강준만이 만든 '저널룩' <인물과 사상>이었다. 그 지면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은 진중권은 그 작업을 쭉 이어나갔고, 그렇게 만들어진 원고가 모여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개마고원 펴냄, 1998년)가 되었다.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의 전략은 매우 단순하다. 진중권은 "대한민국 우익들이 쓴 텍스트에서 뽑은 인용"을 서로 충돌시킨다. "즉 나는 이들의 논리를, 이들 자신이 내세우는 논리로 반박하려는 거다. 이게 내 전략이다."(<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1권, 27쪽) 하여 진중권은 자신의 책을 "순문학으로 이해한다."(28쪽) "한국 민중문화의 풍자적 전통을 오늘에 되살려 내가 개척한 새로운 문학 장르", "20세기의 김삿갓", "논문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포스트모던"(같은 곳)을 자처하는 것이다. 독일 유학생이던 진중권의 혈기와 재기가 한껏 느껴지는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같은 사람이 15년 후에 쓴 또 다른 서문을 살펴보자. 그는 <씨네21>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묶으며 다음과 같은 부연설명을 붙인다. "여기에 묶인 글들은 논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필도 아니며, 굳이 말하자면 논문과 수필을 뒤섞어 놓은, 아주 특정한 의미에서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생각의 지도>, 5쪽)

본인의 '풍자문학'이 "논문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포스트모던"이라고 스스로를 조롱했던 이가, 15년이 지난 후에는, 진지한 어조로 자신의 글을 "굳이 말하자면 논문과 수필을 뒤섞어 놓은, 아주 특정한 의미에서 '에세이'"로 소개한다. 전자는 '놀이'로 '포스트모던'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굳이 말하자면) '일'로 '포스트모던' 하고 있는 것이다. 조각글을 모아서 책을 내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2000년의 진중권은 "내가 생각하던 글쓰기는 이런 게 아니"라고 절규했지만, 언제부턴가 그는 자신의 '잡문'을 하나씩 흩뿌린 후 '별자리'를 만드는 게 가능하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실패한 유학생 진중권이 개척한 길은 그야말로 전인미답의 것이었다. 그는 인터넷이라는 광장에서 질펀하게 뛰어노는 지식인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자신이 동경하는 디오게네스에 가장 잘 부합하는 지식인을 단 한 사람 꼽자면, 한국이 아니라 전 세계를 통틀어 봐도 진중권을 따라올 자가 없다. 자동차 면허증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항공기 면허증은 있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많은 글을 쓰지만 가장 선호하는 작업실은 대한민국 어디서나 반경 2킬로미터 안에 하나씩은 있는 PC방이며, 음악에는 조예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울적할 때에는 샹송을 듣는 그런 지식인의 모습을 진중권은 만들어냈다. 그것을 우리는, 그가 선호하는 표현대로라면, '존재미학'이라고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존재미학'이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진중권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한국에서 독일로, 다시 독일에서 한국으로 던져진 자신의 삶이 비루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것을 견뎌내기 위한 작은 보루로서 존재미학을 꺼내들었다.

내 꿈은 삶의 예술가(lebenskünstler).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은 생존 예술가(Überlebenskünstler). 앞으로도 전망이 좋아 보이지 않지만, 내가 좋아서 선택한 길.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 누구 허락받지 않고 책을 번역할 자유, 누구에게 욕먹지 않고 책을 쓸 자유,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인정사정 보지 않고, 소위 분위기라는 이름의 상황 논리, 대중이란 이름의 평균성에 구애받지 않고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말할 자유. 이 귀중한 자유의 대가라 생각하면 그뿐. 물론 나도 남 잘사는 거 보면 배가 아프다. 이 현실적 결핍감을 심리적 풍족감으로 보상하는 방법. '존재 미학'. 객관적으로 보잘것없는 내 삶을 주관적으로 심오하게 포장해주는 사적 이데올로기. (<시칠리아의 암소>, 269쪽)

그러나 진중권이 본인의 '포스트모던'한 글쓰기를 비웃음의 대상이 아니라 진지한 학문적, 문예적 실천으로 간주하게 되었을 때, '존재미학'의 크기도 한없이 커졌다. 이제 그것은 단지 초라한 자신을 지탱하기 위한 사적 이데올로기에 머물지 않는다. '포스트모던'해진 관계로, 어떤 정치적, 도덕적 당위를 타인에게 강요할 수도 없게 된 진중권이, 궁극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최종 심급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삶에 의미를 주려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공약을 해야 한다. 공약을 한다는 것은 그에 따르는 부담 역시 기꺼이 지겠다는 선언이다. 하지만 이를 귀찮은 의무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공약을 통해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자신을 형성하는 존재미학의 실천이다. 그림을 그릴 때에 화면에서 미적 필연성을 따르면서도 우리가 그것을 제약으로 느끼지 않듯이, 공약의 부담을 지는 것도 자유로운 행위가 될 것이다. (<생각의 지도>, 190쪽)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그들에게 꼭 필요한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을 요구하는 방법론으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이 '공약'과 그것을 지키는 '존재미학'이다. 진중권의 지적 체계 속에서,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사회적 원칙은 궁극적으로는 이것뿐이다. 마치 원칙과 공약을 잘 지킬 것 같은, 약속과 신뢰의 존재미학 그 자체였던 정치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지금, 이 구절은 더욱 씁쓸하게 다가올 뿐이다.

11.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진중권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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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2004년의 그때로 돌아가 보자. "박정희 망령은 물러갔고, <조선일보>는 제 몫을 찾았고, 한나라당은 몰락했고, 민주노동당은 정치적 진출에 성공"했던 그 때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박정희는 별개의 인격체이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의 당선을 박정희 망령의 귀환으로 바라보고 있다. <조선일보>는 제 몫의 종편을 찾았다. 한나라당은 새누리당으로 개명하고 붉게 타올랐다. 민주노동당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지 오래다. 그때의 성취 중 지금까지 제 모습을 하고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철학과 미학의 텍스트에서 배운 내용과, 독일에서 유학 생활을 통해 익힌 문자문화적 습속을 가지고 왔던 진중권은, 어쨌건 이 세상이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생각을 하고, 어깨를 으쓱해 보인 후 자신의 완강한 모더니즘을 서서히 털어냈다. 그는 스스로가 '포스트모던' 하게 글을 쓴다는 것을 시인하고, 서양의 철학적 개념을 한국의 현실에 적용하는 '잡문'을 평생 써야만 하는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그는 '포스트모던'을 모던한 문체로 설명하는 작가가 되었다.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는 달랐다. 어차피 그것이 전부 유희일 뿐이므로, 지금도 보기 힘든 '미치광이 같은' 문체 실험이 마구 쏟아졌다. 동음이의어, 특수문자한자알파벳등 온갖 '비-한국어'의 요소들이 끼어들었고, 인용문과 인용문이 서로 헐뜯었으며, 모든 페이지가 현란한 지성과 능란한 조롱으로 폭발했다. 강고한 모더니스트가 쓴, 최고의 포스트모던 텍스트였다고 우리는 그 책을 기억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언제나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으면 다행이었다. 진중권은 또 다른 진중권이 되면서 우리에게서 진중권을 빼앗아갔다. 그의 초창기 활동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가장 올바르고 정의로운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그를 잃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촛불시위 이후 스타가 된 진중권만을 아는 이들은, '비판적 지지' 논쟁을 하며 게시판에서 밤을 새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네티즌의 속을 긁어대는 진중권을 모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진중권은 예전의 진중권이 아니다. 하지만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닌 것은 나와 당신과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날렵한 논객과 함께 논객시대를 살아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변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프레시안(손문상)
 

/노정태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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