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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라

건축사의 보물, 어린이 대공원 '꿈마루'

by 아잘 2011. 11. 22.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06408.html

공무원이 우연히 찾아낸 한국 건축사의 ‘보물’
등록 : 20111121 15:43 | 수정 : 20111121 16:11
어린이 대공원 누더기 건물 도면 보니 이상한점 발견
교수에 문의해 보니 사실은 건축가 나상진의 대표작

 우리나라에 골프가 처음으로 전래한 것은 100여년 전, 그 때 처음 골프를 치던 극소수의 사람들 중에 이 사람이 있었다.

 

 1930년, 영친왕의 모습이다. 나라 빼앗긴 왕족에게 달리 할 것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중요한 것은 저 골프장이 어디냐는 것. 군자리 골프장이었다. 지금의 군자동이다. 군자동 어린이회관은 원래 골프장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골프장이었을 리는 없다. 저 골프장 자리는 마지막 황제 순종의 부인 순명황후의 묘였다. 지금 광진구 능동이 그래서 이름이 능동이 된 것이기도 하다. 황후의 능이 골프장이 된다는 것, 어처구니없지만 그게 일제강점기 때엔 당연한 일이었다.


▲ 1929년 군자리 골프장 사진


 

경성골프장은 해방 뒤 서울컨트리클럽으로 바뀐다. 당연히 한국에서 가장 좋은 골프장이다. 서울 안에 있으니 세도가들이 몰릴 수밖에.

 그런데 이 골프장이 하루아침에 어린이대공원이 된다.
 그 사연의 정설은 이렇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 한 마디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워커힐 호텔을 국가사업으로 지어놓고 가끔 호텔에서 비밀리에 쉬기를 좋아했던 박 대통령은 지금은 사라진 삼일고가도로를 타고 워커힐로 가다가 저 골프장을 보고 크게 노했다고 한다. ‘조국 재건의 기치 아래 모두가 뼈빠지게 일하고 있는데 평일 낮에 저렇게 한가하게 골프치는 인간들은 도대체 무슨 작자들이냐’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당장 저놈의 골프장 없애버리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물론 자료로 확인되는 사실은 아니나 당시 관계자들이 증언하는 이야기다.

 공원이 생기는 좋은 일인데, 난리가 나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서울시청 담당자들이었다. 하루아침에 지엄하신 대통령의 말씀으로 공원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이러저러해서 공원은 어린이 대공원으로 정해졌고, 왜 그렇게 급해야 했는지 모르겠지만 개관 일정은 아주 촉박하게 정해졌다고 한다.





 아니, ‘공원이란 게 도시의 필수 공간인데 그리고 공원 기획하고 만드는 게 시 공무원 일인데 뭔 난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것은 당시 상황을 파악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서울시에는 공원다운 공원은 없었다. 서울에 처음 들어선 근대식 공원은 탑골공원. 그러나 면적으로 보면 아주 작다. 반면 저 군자동 골프장은 굉장한 넓이였다. 대형 공원을 한번도 만들어본 경험도 없는데 그 넓은 공원을 어린이들을 위한 전용 공원으로 단숨에 내용을 채워 만드는 것은 실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마디로 전무후무한 일이 날벼락처럼 떨어진 거다.

 그래서 군사독재 시절답게 서울시는 미친 듯이 뛰어 결국 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빨리 완성하는 게 좋은 것은 아니지만 어린이들이 좋아할 놀이시설을 집어넣고(그래서 한국 최초의 롤러코스터 ‘청룡열차’가 들어선다), 괜히 만들어 남산에 처박아 놨던 위인 동상들도 옮겨오고, 조경 꾸미고, 코끼리니 사자니 창경원(당시는 창경궁이 동물원과 식물원이었던 ‘창경원’이었다) 등에 있던 짐승들도 가져다가 최초의 어린이 공원인 어린이대공원을 만들었다.

 왜 어린이대공원이냐, 당시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는 어린이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어린이회관도 짓고, 육영재단이란 것도 만들었다. 하여간, 과정은 어찌되었든 서울시에, 제대로 된 어린이 전용 공간이, 얼떨결에 ‘하면 된다’ 정신의 힘으로 처음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어린이대공원은 이렇게 1973년 군자동에 들어섰다. 개장 날짜는 당연히 5월5일, 어린이날이었다.


▲ 개장 당시 어린이대공원 사진

 이후 어린이대공원은 70~80년대 어린이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곳이었다. 에버랜드나 서울랜드나 롯데월드가 생기기 전까지 대한민국 어린이들은 어린이대공원에 가서 청룡열차 타보는 것이 소원이던 시절이 있었다. 테마파크들이 생긴 뒤에도 어린이대공원은 도심 속 몇 안 되는 가족 나들이 장소로 애용되며 지금에 이른다. 그러던 2010년 봄 어느 날, 건축가 조성룡 성균관대 석좌교수는 뜻밖의 전화를 받는다. 전화해온 이는 최광빈 당시 서울시 국장이었다. 어린이대공원 관리사무소로 쓰던 일명 ‘교양관’ 건물이 너무 크고 춥고 증·개축을 많이 해 누더기처럼 낡아서 헐고 새로 지으려는데 도면을 보니 이상한 게 있다며 한번 검토해달라는 것이었다.

 도면을 받아본 조성룡 교수는 깜짝 놀랐다. 겉에 판을 씌우고 있고 덕지덕지 덧붙인 건물의 도면 속 원래 모습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처음 지어질 때의 교양관 건물은 거대한 콘크리트 판이 수평으로 길게 뻗고, 웅장한 기둥들이 떠받치는 근사한 디자인이었다. 마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을 연상시키는.

 조 교수가 자세히 알아보니 건물은 역시나 예사 물건이 아니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 건축을 대표하던 건축가 고 나상진(1923~1973)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건물 디자인은 나상진의 대표작으로 꼽을 정도로 좋았다. 그리고 또다른 역사적 의미가 담긴 건물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장 클럽하우스 건물이었다. 골프장 시절, 모처럼 제대로 콘크리트 클럽하우스를 지었는데, 짓자마자 골프장이 어린이대공원으로 바뀌는 바람에 공원 건물로 용도변경된 것이었다.

 조 교수는 곧바로 최 국장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이 건물은 문화적으로 보존가치가 있으니 살리자고 제안했다. 이미 신축 결정을 내린 뒤였기에 서울시 쪽으로선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행하게도 이 건물을 헐어버리지 않고 원형을 되살리면서 그 안에 관리사무소 기능을 다시 담기로 했다. 전화 한 통 덕분에 숨어있던 건물은 그렇게 되살아나게 된다. 기존 새 건물 건축팀에 조성룡 교수와 최춘웅 고대 건축과 교수가 콤비로 합류해 건물 복원은 시작됐다.

 조 교수팀이 제안한 것은 ‘걷어내기’였다. 기존 건물의 뼈대 자체가 튼튼하고 디자인적으로도 우수한만큼 덧씌운 것을 걷어내어 원래 모습을 살리자는 것이었다. 조성룡 교수는 한강변의 못쓰게 된 수도시설을 부숴버리지 않고 오히려 활용해 서울의 명물인 ‘선유도 공원’으로 만들어낸 바 있다. 이 건물 역시 그렇게 되살리는 방식을 택했다. 덧댄 것들을 걷어낼수록 건물은 오히려 아름다워졌다.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과 판이 만들어내는 공간감은 40여년 전 것이었어도 여전히 미학적 힘을 지니고 있었다.

 

 건물 안팎의 치장을 걷어낸 뒤 구조를 보강하고, 뼈대만 남게 된 건물 속에 다시 건물을 넣는 방식으로 새 사무실을 지었다. 지상 3층 콘크리트 기둥 구조는 그대로 살리고, 내부 시멘트 벽은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기 위해 변형된 모습 그대로 놔두기로 했다. 외부로 돌출된 구조물 사이에는 나무를 심고, 안전도가 떨어지는 원형 램프(경사 진입로)는 화단으로 바꿨다. 건물 외부 공간은 이제 시민들이 쉬거나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쉼터와 전망대로 조성됐다.

 그리고 올해 5월, 최초의 골프장 클럽하우스였다가 각종 어린이용 상업 전시가 열리는 이벤트 공간이자 공원 관리사무소로 쓰이던 이 건물은 완전히 새롭게, 최초의 모습에 가깝게 다시 문을 열었다. 그리고 ‘꿈마루’라는 새 이름도 얻었다.

 겉으로 봐서는 이 변화를 잘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내부를 보면 비슷한 것 같아도 달라졌다.

 내부는 거친 콘크리트의 질감과 기둥 구조를 살리면서 최소한으로 꾸몄다.

 사무실 인테리어야 특별할 게 없지만, 위쪽을 보면 이 건물의 구조와 재질이 드러난다. 일부러 남긴 시간과 공간의 흔적이다.

 이 건물 디자인의 핵심은 구조체의 뼈대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구조미와 공간감. 건축가들은 이를 최대한 살렸다. 선배 건축가가 40년 전 만든 건물은 이렇게 후배 건축가들에 의해 재발견, 재건축, 재탄생됐다.

 역시 일부러 남겨둔 거친 흔적들이다. 새로 덧댄 부분과 대비가 되는 듯하면서도 조화를 이룬다.

 돌을 정성껏 붙여 만든 외부의 조형적 요소들도 오랜 세월의 느낌을 간직한 채 새로워졌다. 안전 문제가 있는 경사 진입로는 식물들의 길이 됐다.

 건물 안과 밖이 이어지는 경계 공간은 나무와 조경들이 들어가 건축과 자연, 외부와 내부, 사람과 건물을 잇는다. 벽에 드리우는 나무줄기 그림자는 그 자체로 건축과 자연이 합동으로 만들어내는 무늬다.

 옆으로 난 정문은 정말 인상적이다. 거대한 뗏목이랄까, 아니면 신전 같기도 한 기둥 구조가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근사하다.

 지금처럼 기술이 좋지 않았고 사정은 열악했던 당시 나상진 건축가는 이 건물을 무척 높은 완성도로 지어냈다. 일부러 거칠게 처리한 표면 등을 보면 손맛이 살아있다. 그리고 화끈할 정도로 강력한 구조로 빚어낸 건물 모습은 다른 건물에선 볼 수 없는 특별한 느낌이 있다.

 용도가 불분명하고 쓰기 불편했던 건물이 재정비되면서 이용객들에게도 좋은 일이 생겼다. 건물 앞에 사람들이 쉬어가고 이벤트도 벌일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이다.

 이전 교양관 시절,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자리했던 이 건물은 이런 건물이 있었는지도 모를 지경으로 가려지고 눈길도 끌지 못했다. 하지만, 꿈마루로 바뀐 이젠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주며 공원의 새 랜드마크가 되었다.

 새로 탄생하다시피 돌아온 꿈마루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이 건물은 아무도 모르게 사라질뻔했다. 그러나 사소한 것을 놓치지 않은 공무원의 눈썰미가, 자료를 뒤져 가치를 찾아낸 건축가의 관심이, 발견된 가치를 소중히 받아들이기로 한 공무원의 고민이, 그리고 건물을 살리는 것도 건축임을 보여준 건축가의 열정이 주거나 받거니 이어지면서 이 건물을 살려 시민들에게 돌려보냈다.

 꿈마루는 이렇게 ‘먼길 돌아서 이제 와 우리 앞에 선’ 그런 건물이다. 세월이 쌓이면 어떤 건물이든 가치를 갖게 된다. 공간을 완성하는 것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시간이 밴 공간을 지우고 헐기에 바빴다. 그런 속에서 살아난 저 건물은 그 과정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새로 짓는 것만이 건축이 아니라 되살리는 건축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집이다. 이 과정 속에서 잊혔던 당대의 건축가 나상진도 다시 살아났다.

 좋은 건축은 어떤 건축일까? 개인적으로는 ‘아름다운 건물’ 이전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건물’일수록 좋은 건물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대공원에 갈 일이 있다면 입구 들어서자마자 무뚝뚝한 듯 경쾌하게 솟아있는 저 건물에 한번 들어가 보시길. 세월과 역사와 이야기와 느낌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꿈마루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글=구본준 기자/사진=김재경 건축전문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