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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 지식

419 형님들은 도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by 아잘 2015. 4. 29.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2929

 

“형님들은 도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4·19 혁명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우고 희생을 치른 이들은 중·고등학생이었다. 선봉에 선 이들은 진정한 의미의 민주공화국을 만들어냈다. 그해 봄을 거치며 대한민국은 그 어느 나라에 비해도 꿀리지 않는 자긍심을 획득했다.

  조회수 : 18,224  |  김형민 (SBS CNBC 프로듀서)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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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호] 승인 2015.04.28  08:49:28
1960년 대한민국의 경제 사정은 세계 최악이었어. 1인당 국민소득 79달러로 막 독립한 아프리카 신생국인 가나나 가봉만도 못했고, 동남아시아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우리의 3배였으며, 하다못해 북한도 저만치 우리를 앞지르고 있었단다.

그런데 한국은 비슷한 처지의 다른 나라들과는 크게 다른 점이 하나 있었어. 캄보디아에 여행 갔을 때 가이드 아저씨에게 들은 얘기 기억나니? ‘원(one) 달러’ 부르짖는 아이들에게 가급적 돈 주지 말라고. 부모가 거기에 맛 들여서 아이를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구걸시킨다고. 하지만 한국 부모는 어깨가 빠지고 등골이 휘면서도 어떻게든 자식은 학교에 보내려고 기를 썼던 거야.

1960년대 파키스탄과 우리의 경제 사정은 비슷했는데, 초등학교 취학률에서는 30%와 94%라는 압도적 차이를 보여. 물론 우리나라에도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공부하고픈 욕망을 꺾어야 했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만큼 많은 학생이 ‘배워야 산다’며 호롱불 밑에서 책을 읽었지. 그리고 1960년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어른이 되기도 전에 역사의 물줄기를 극적으로 바꾸게 돼. 바로 12년을 장기 집권해온 이승만 정권을 타도한 4·19 혁명이었지.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1960년 4월19일 경무대(현 청와대) 앞에 모인 시위대.  
ⓒ연합뉴스
1960년 4월19일 경무대(현 청와대) 앞에 모인 시위대.
그런데 오해하지 말 것. 첫째 4·19는 4월19일에 갑자기 일어난 게 아니야. 그 이전부터 약 한 달 동안 대한민국은 이미 태풍에 휩싸여 있었어. 그리고 둘째, 이 4·19 혁명을 주도한 ‘젊은 사자들’은 대학생만은 아니었다는 거야. 물론 대학생의 역할도 컸지. 하지만 4·19의 원천부터 폭발까지 가장 큰 공을 세우고 희생을 치른 이들은 뜻밖에도 중학생·고등학생이었어. 학생과 시민 186명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는데, 그중 대학생은 22명이고 고등학생은 36명이야. 대학생보다 훨씬 많은 고등학생이 죽어갔다는 뜻이야. 심지어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합친 희생자도 19명이나 된단다. 대학생의 두 배가 넘는 초·중·고교생, 즉 ‘어린 사자들’이 거리에 쓰러졌던 거야.

애초에 4·19라는 거대한 파도를 예감케 하는 작은 파문을 일으킨 것도 고등학생이었어. 그해 대통령 선거는 3월15일이었는데 선거 유세 과정에서도 이승만 정권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지질함’을 보여주었지. 이를테면 여당이 유세를 하면 공무원·학생 등을 동원하고, 야당이 유세하면 갑자기 휴일 출근을 시킨다거나 단체 영화 관람을 간다거나. “학생을 정치의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고 들고일어선 이들은 대구 경북고등학교 학생이었어. 1960년 2월28일이었지.

보름 뒤 3월15일 치러진 선거는 세계 선거 역사에 길이 기억될 부정선거였어. 투표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투표함에는 투표용지가 수북이 차 있었고, 느닷없이 정전이 되고 투표함이 슬쩍 뒤바뀌는가 하면, 3인조니 5인조니 나란히 손잡고 들어가서 서로 투표를 확인하고 나오는 등 그야말로 눈이 튀어나오도록 희한한 부정이 펼쳐졌어.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4월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군의 시체는 전 국민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연합뉴스
4월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군의 시체는 전 국민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여기에 분통이 터진 경남 마산 시민은 부정선거이니 다시 하라며 시위를 벌이게 돼. 밤이 되어도 수그러들지 않는 시위대를 향해 급기야 경찰은 발포했고 시민과 학생 12명이 숨을 거둬. 그 가운데에는 마산고등학교 1학년 13반 반장이었던 김용실도 있었어. 그가 피를 뿜으며 병원에 실려 왔을 때 누구보다 놀란 건 간호사들이었어. 간호사들은 이 소년을 알고 있었거든. 1년쯤 전, 무슨 일로 다쳐서 피를 흘리는 술 취한 노인을 들쳐 업고 병원까지 와서 “이 할배 좀 살려주이소”를 부르짖었던 착한 학생이었지. “용실이다.  총 맞은 사람이 그때 용실이다.” 간호사들의 눈물겨운 간호도 헛되이 김용실 학생은 숨을 거뒀어.

그런데 이승만 정권의 경찰은 또 한 번 못할 짓을 해. 그 학생의 주머니에 요상한 ‘불온 삐라’를 넣어두고 그게 나왔다며 빨갱이로 몰아갔던 거야. 며칠 뒤 검사가 이 사건을 조사할 때 간호사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그런 삐라 없었습니다. 도리어 경찰이 원장님한테 삐라가 주머니에서 나왔다고 검안서에 적으라고 했는데 원장님이 거부했습니다.”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분위기에서도 간호사들이 그런 용기를 낸 건 서로 내 동생 삼자고 했다는 착한 소년 용실이의 얼굴이 떠올라서가 아니었을까.

“형님들은 도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3·15 시위 때 연행됐던 마산상고 1학년 (마산상고 시험을 보고 합격자 명단을 보러 고향에서 마산으로 왔던) 김주열은 그로부터 한 달 뒤인 4월11일 마산 앞바다에 참혹한 시체로 떠오른다. 오른쪽 눈에는 최루탄이 박혀 있었고 물고기가 파먹은 흔적도 역력한 이 고등학생의 시신은 전 국민의 분노를 폭발시켰어. 수천명이 경찰의 제지를 뚫고 병원에 들어가서 그 시신을 보고 나왔고 어머니는 시신 인수를 거부했어. “부정선거 해서 당선된 이기붕에게나 갖다 주시오!” 제2차 마산 시위가 벌어졌고 학생들은 물론 중년 아주머니까지 시위대에 합류했어. “내 자식도 죽일 셈이냐.”

3월15일 부정선거와 4월11일 김주열의 시신 발견을 전후해서까지, 전국에서 교문을 박차고 나온 건 대학생이 아니라 고등학생이었어. “우리더러 눈을 감으라 한다. 귀를 막고 입을 봉하라 한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가슴 속에 한 조각 남은 애국심이 눈물을 흘린다”(부산고등학교 학생들의 선언문). 운명의 4월19일을 열어젖힌 것도 대학생이 아니라 고등학생이었어. 4월19일 아침 첫 시위를 감행한 건 서울 대광고등학교 학생이었단다. “우리 조국은 어디까지나 민주공화국이요, 결단코 독재국가, 경찰국가는 아니다.” 그 후에야, 고등학생이 대학생더러 “형님들은 도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외친 뒤에야 대학생들이 파도와 같이 밀려나왔던 거야.

그 뒤로도 청소년의 분노는 대학생에 못지않았어. 한 덕수상고 학생은 총에 맞았지만 다리를 절면서도 시위를 계속하다가 경찰의 조준 사격에 심장이 꿰뚫려 죽었어. 한 여중생은 아예 유서를 써놓고 데모에 참여했다가 역시 목숨을 잃는다. 너랑 비슷한 나이였을 이 여중생의 유서 한 대목은 이랬어.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가끔 아빠는 그 모습을 상상해보곤 한다. 깻잎머리에 검은 교복, 키는 너보다도 작았을 여중생이 엄마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고 거리로 나설 때의 표정. 그 어깨. 발걸음.

앞서 말했지만 대한민국은 세계 최악의 나라였어. 하지만 1960년 봄을 거치며 대한민국은 그 어느 나라에 비해도 꿀리지 않는 자긍심을 획득해. 이승만 대통령은 이런 말을 하면서 물러났다고 해. “불의를 보고서도 일어서지 않는 국민은 죽은 국민이다.” 그 불의를 만들고 불의에 일어선 사람들을 학살한 정권의 책임자가 하기엔 너무나 역설적인 말이긴 하지만 어쨌든 옳은 말이다. 4·19를 통해 대한민국 국민은 힘 앞에서도 무기력하지 않고 불의의 위협 앞에서도 고개 숙이지 않는, 민주주의 국가의 ‘살아 있는’ 시민임을 선언했던 거란다. 선봉에 선 청소년은 이름뿐인 대한민국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건설했던 거란다. 아빠나 너나 그들에게는 많은 빚을 지고 있어. 빚을 갚는 일은 뭐니 뭐니 해도 ‘불의에 일어나지 않는 죽은 국민’이 되지 않는 거겠지. 그런데 아빠는 그 생각만 하면 괜히 빚쟁이가 된 마음에 안절부절못하게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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