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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라

유재하와 봉준호, 두 천재가 만난 아련한 순간

by 아잘 2014. 11. 14.

유재하와 봉준호, 두 천재가 만난 아련한 순간

[그 영화, 그 음악] 영화 ‘살인의 추억’과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

수정: 2014.11.08 04:40
등록: 2014.11.0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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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살인의 추억' 한 장면

피아노를 잘 치던 남자, 그에겐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다. 음대 연합 동아리에서 만난 여자였는데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한눈에 반했다. 그녀를 떠올리며 노래를 만들었다. 그 노래로 사랑을 고백했다. 완곡한 거절의 답변이 돌아왔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고백하고 또 고백했다.

2년이 지나 그는 그녀에게서 처음으로 답장을 받았다. 떨리는 가슴으로 천천히 봉투를 뜯었다. 우울한 편지였다. 남자는 여자와 꿈에 그리던 연인이 됐다. 하지만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다 여자는 끝내 그의 곁을 떠났다. 멀리 유학을 떠난 것이다. 술과 눈물을 삼키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고통을 피해 도망갈 수 있는 곳은 군대뿐이었다. 제대하고 떠나간 연인을 만나겠다며 비행기에 올라도 봤지만 결국 그는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와 만나고 헤어지면서 썼던 곡들로 앨범을 내기로 했다. 누군가 그의 소원을 들었을까. 기적이 일어났다. 그녀가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노래하는 그의 옆에서 플루트를 연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낙담의 나날이 이어졌다.

평소 가지 않던 동창회에 들른 남자는 함께 술을 마셨던 친구가 운전하던 차에 올라탔다. 차가 흔들거리더니 중앙선을 넘어섰다. 맞은 편에서 택시가 달려오고 있었다. 남자와 미래를 꿈꿨던 여자는 더 이상 그를 만날 수 없었다.

매년 11월 1일이면 우리는 유재하(1962~1987)가 남긴 노래를 꼬박꼬박 듣는다. 데뷔 앨범이자 유작인 ‘사랑하기 때문에’(1987)에 담긴 아홉 곡을 들을 때마다 생각한다. 그의 음악이 위대할 예술로 남을 수 있었던 건 출중한 재능보다 용암보다 뜨거운 사랑 덕분이 아니었을까 하고. 그가 살아 있었어도 그보다 훌륭한 곡은 만들었겠지. 그렇지만 그보다 아름다운 곡을 다시 쓰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첫사랑의 강렬한 감정처럼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들은 한번 지나가고 나면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실제로 그가 남긴 아홉 곡은 모두 한 여인에 대해 쓴 것들이다. 6년여에 걸친 절절한 사랑이 불멸의 걸작을 만든 셈이다. 유재하의 노래를 사운드트랙으로 쓴 영화를 찾긴 쉽지 않은데 ‘살인의 추억’(2003) 정도가 거의 유일하다. 뻔한 재능의 감독이었다면 유재하의 노래를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 장면에나 끼워 넣었을 테지만 봉준호 감독은 달랐다. 그는 무시무시하게도 연쇄살인의 주제가로 ‘우울한 편지’를 사용했다. 살인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방송됐던 곡이라니. 엽서에 쓰인 글귀는 이렇다. ‘태령읍에서 외로운 남자가 보냅니다. 비 오는 밤 꼭 틀어주세요.’

늦은 밤 달빛밖에 없는 산 속 무덤가에서 단아하게 처량한 이 노래가 흘러나올 땐 소름이 돋는다. 처음 이 영화를 볼 때도 굉장히 기묘하면서 탁월한 선곡이라 생각했는데 보면 볼수록 경이롭다. 유재하가 연인에게서 처음 편지를 받고 그 때의 심정을 담아 쓴 재즈풍의 이 노래는 편지의 실제 주인공이 연주하는 플루트 소리로 시작해 유재하의 재즈 피아노로 이어진다.

‘일부러 그랬는지 / 잊어버렸는지 / 가방 안 깊숙이 / 넣어 두었다가 / 헤어지려고 할 때 / 그제서야 / 내게 주려고 쓴 편질 꺼냈네 / 집으로 돌아와서 / 천천히 펴보니 / 예쁜 종이 위에 / 써 내려간 글씨 / 한 줄 한 줄 또 한 줄 / 새기면서 나의 거짓 없는 맘을 띄웠네 / 나를 바라볼 때 눈물 짓나요 / 마주친 두 눈이 눈물 겹나요 / 그럼 아무 말도 필요 없이 / 서로를 믿어요’

장조와 단조를 오가는 독특한 형식에 재즈에서나 쓰는 코드 진행인데도 매우 편하고 자연스럽게 들리는 오묘한 곡이다. 작은 몸집인데도 가벼운 손동작 하나로 적을 쓰러트리는 무림의 고수가 떠오른다. 원작인 연극 ‘날 보러와요’에서 나오는 모차르트 레퀴엠 대신 이 곡을 고른 건 봉 감독이다.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1980년대 살아있었지만 지금은 우리 곁을 떠난 가수의 음악을 써야 더 아련한 느낌이 나지 않을까 싶었고 알 듯 말 듯 대중적이지 않은 노래를 써야 노래를 신청한 박해일 캐릭터에 잘 맞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영화에는 ‘우울한 편지’ 외에 장현의 ‘빗속의 여인’, 이문세의 ‘난 아직 모르잖아요’ 등도 나오는데 그 노래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울한 편지’만큼 비 오는 밤의 스산한 풍경에 잘 어울리는 곡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화 덕에 ‘우울한 편지’는 ‘지난 날’과 ‘사랑하기 때문에’에 필적하는 인기를 얻게 됐다. 영화도 유재하의 음악에 적잖은 덕을 봤다. 유재하가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봉 감독은 이 영화에 다른 음악을 썼겠지. 그랬더라도 그 장면이 지금처럼 소름을 끼치도록 할 수 있었을까.

고경석기자 kave@hk.co.kr

☞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 듣기

☞ 유재하의 유일한 방송 출연 모습으로 KBS ‘젊음의 행진’에서 부른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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