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공동 회장이기도 했던 J목사는 죽고 나서 ‘에어컨 목사’라는 별호를 얻었다. 자신이 목회를 맡고 있던 교회의 여신도와 불륜을 저지르다 들켜, 아파트 베란다의 에어컨 환기통에 매달려 있다가 추락사했기 때문이다. 이때 교회는 J목사가 심방 중에 과로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니, 간통 사범이 졸지에 순교자(?)가 됐다. 이 믿지 못할 우스개는 류상태의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삼인, 2005년)에 어엿이 나와 있는 사실이다.

저 사건을 접한 우리는 무척 진지한 신학상의 질문 하나와 맞닥뜨린다. 에어컨 목사는 천국과 지옥 가운데 어디로 갔을까?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 유일한 가르침이자 신앙의 완성인 우리나라 기독교 풍토에서 보자면, 그는 필시 천국으로 갔을 것이다. 비록 간음하지 말라는 십계명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하는 예수의 말씀을 어기기는 했지만, 그가 예수를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게다가 독실했던 그는 땅바닥에 닿기 전에, 회개 기도를 마쳤을 게 분명하다.


ⓒ이지영 그림


위의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지만, 관습적인 기독교도는 모두 이렇게 말한다. 사후에는 누구나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야 한다. 그러나 복음주의 설교자인 랍 벨은 그러지 않았다. 올해 봄 미국에서 출간된 <사랑이 이긴다>(포이에마)는 아예 천국과 지옥을 부정한다. 물론 이런 주장은 무신론자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늘 제기해온 것이다. 문제는 지은이가 복음주의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설교자였던 까닭에 미국 교계가 온통 몸살을 앓았다는 사실이다. <사랑이 이긴다>가 출간된 이후, 벨을 반박하는 책이 연이어 나오고, 그 여파로 남침례교 연차 회의에서는 “지옥에서의 영원하고도 의식적인 징벌을 믿는다”라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미국의 보수주의 기독교계는 ‘간디는 지옥에 있습니다’라는 점잖은 용어로 ‘예수 천국, 불신 지옥’ 구호를 대신한다.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간디는 힌두교가 압도적인 인도에서 태어나 힌두 문화와 관습 속에 자랐다. 그런 그가 다른 종교를 선택할 가능성은, 이슬람 집안에서 태어난 오사마 빈라덴이 미국 남부의 침례교파 교인이 될 확률만큼이나 희박하다. 그래서 지은이는 묻는다. “선택받은 소수만이 천국에 가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그 소수 중 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적절한 장소와 가족과 나라에서 태어나는 것?”

하나님은 공의롭다. 그런데 고작 60년 동안 악행을 저질렀다고 해서, 한 인간을 지옥불에 영원히 던져두는 것이 과연 공정한 판결인가? ‘60년’과 ‘영원’은 같은 저울에 놓을 수 있는 무게가 아니다. 영원에 비하면 60년이란, 눈 깜짝할 사이조차 못 된다. 또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자녀’로 여기신다. 그런데 어느 아버지가 일순간 자녀가 저지른 잘못을 벌하고자 영원한 형벌을 준다는 말인가? 지은이의 표현을 고스란히 따르자면, 그런 아버지는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아동학대범이다.

기독교의 취약한 내세관을 공격하는 일은, 테트리스만큼 손쉽다. 그러니 지은이를 따라 좀 더 성서 깊숙이 들어가 보자. 먼저 천국 편. 흔히 천국은 ‘다른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가정되지만, 예수는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룸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지은이에 따르면 ‘영원(eternal)’이라 번역되는 헬라어 ‘아이온(aion)’은, 한도 끝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특별히 강렬한 경험을 뜻한다. 다시 말해 영원한 생명이나 천국은 죽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경험되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 뜻하는 바는, 어떤 미래에 살고 싶은가 하는 절실함이 지금-여기를 천국으로 바꾸는 사회적 동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라면 전쟁·환경오염·인종주의를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 당신들이 상상하는 천국에 그런 것은 없기 때문이다.


성서에 ‘영원한 심판’ 따위는 없어

<사랑이 이긴다>랍 벨 지음포이에마 펴냄
다음은 지옥 편. 유대 언어와 성서에는 지옥이라는 말도 개념도 없다. 단,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들면서 ‘지옥’을 언급했는데, 여기에 대한 지은이의 해석은 그저 찬탄스럽다. 지옥에 떨어져 있으면서 천국에 있는 거지 나사로에게 ‘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는 부자는, 아직도 누군가가 자신을 섬기기를 원한다. 그런 뜻에서 “죽어서도 살아 있”는 그는, 온전히 죽어야 다시 얻을 수 있는 새 생명을 얻지 못한다. 이 해석은 하나님의 심판이 항상 ‘회복’을 전제하고 있다는 논의로 이어진다.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당한 창세기 19장만 알고 있지, “소돔과 그 딸들을 다시 잘 살게 해주고” “예전 상태로 회복될 것”이라는 에스겔 16장은 잘 모르고 있다. 성서에는 회복이 있을 뿐, ‘영원한 심판’ 따위란 없다.

벨은 지옥 편에서도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에 대해서 무척이나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지금 이 지구상의 지옥에 대해서는 그만한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라면서 굶주린 이웃과 오염당하는 지구를 외면하는 위선적인 기독교인을 질타한다. 얼핏 해방신학을 연상케 하지만, 이 책의 목적은 복음 전도다. 지은이는 사랑의 예수 뒤에 어른거리는 하나님의 지옥이 말이 되지 않아서 기독교를 멀리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이 ‘거짓 교사’라는 오명을 쓴 것은, 그가 탕자의 비유를 해석하면서 예수를 믿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는 보편구원론을 암시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은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받아 탕진해버린다.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를 위해 잔치를 베풀자, 큰아들이 불만을 표한다. 여태껏 종노릇을 했던 자신을 위해서는 한 번도 잔치를 베풀어주지 않았으니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그러자 아버지는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기독교인(큰아들)은 하나님 품안에 있으면서 늘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는 반면, 이교도(작은아들)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서도 구원을 얻는다. 까닭은 큰아들의 불평과 달리,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 바로 은혜와 자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림없겠지만, 벨은 아직도 목사직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