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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정치

박한용- 박정희에 대해 할 말 많습니다.

by 아잘 2015. 2. 2.

http://m.cafe.daum.net/scwelfare.government/JL0z/1?q=%E8%AB%9B%EB%BA%A4%EC%A0%99%EF%BF%BD%D1%8A%EB%BF%89+%EF%BF%BD%EF%BF%BD%EB%B9%90+%EF%BF%BD%EC%A2%8A%EC%AD%9A+%E7%95%99%EB%A1%AE%EB%92%BF%EF%BF%BD%EB%8D%88%EB%96%8E+%28%E8%AB%9B%EB%BA%A5%EB%B8%B3%EF%BF%BD%EF%BF%BD%E8%AA%98%EC%87%B1%E2%80%9D%E8%87%BE%EB%AA%84%EC%A0%A3%EF%BF%BD%EA%B3%8C%EB%8E%84%EF%BF%BD%EF%BF%BD%EF%BF%BD%EA%B3%8C%EB%8E%84%EF%BF%BD%E3%85%BC%EC%98%A3%29

 


박정희에 대해 할말 많습니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작성자김범우|작성시간13.08.01|조회수1,384 목록 댓글 1

         박정희에 대해 할말 많습니다

 

 

       박한용(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박정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고민되신다고요. 한편에서는 700억원을 들여 박정희 기념관을 만든다고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친일파·독재자인 박정희를 기념한다는 게 말이 되냐며 반대하고 있으니, 박정희시대를 겪지 않은 어린 학생들이 혼란을 느낄 법도 합니다. 게다가  양극단으로 치닫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교육적 견지에서 어떻게 학생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라·········
  사실 박정희는 단순히 친일파라는 잣대로만 평가하기에는 무리이죠. 일본군 하급장교였던 박정희는 이완용, 이광수 같은 거물친일파와 비교하자면 피래미급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물론 이 피래미들이 독립운동가와 조선민중에게는 가장 직접적으로 해악을 끼쳤지만 말입니다). 박정희는 오히려 해방 후 약 20년간 한국의 최고통치자로서 우리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친일행적은 박정희 평가에서 부차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친일파였다는 사실은 그의 삶과 사고방식 그리고 통치형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그를 평가할 때 반드시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합니다.
  우리 현대사 속에서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 근현대사를 어떤 기준에서 어떤 가치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결론이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두환이 바라보는 박정희상과 선생님이 바라보는 그것이 차이가 날 수 있듯이 말입니다. 게다가 박정희를 평가하는 것은 사실 우리 현대사 전체를 검토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때문에 이 글을 어떤 결론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견해로 이해해 주시고 선생님의 생각을 가다듬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대통령이 되기 전의 박정희의 행적을 생각해 봅니다.

 

  첫째 박정희는 친일파가 아닙니다. 일본제국주의 최후의 군인이었을 뿐입니다.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마치고 국민학교 교사를 하다가 혈서편지를 쓰고 인맥을 동원하면서까지 일본군에 입대하기 위해 악을 썼습니다. 가난, 무지, 철없는 만용, 강제 등의 이유로 일본군에 입대한 것과 전혀 다른 경우지요. 박정희의 교사생활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제는 조선인을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보내려고 아예 어릴 때부터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았습니다. 혈기왕성한 식민지 청년들에게 총을 준다는 게 일제로서는 대단한 모험이었으니까요. 일제말 국민학교(초등학교)가 많이 설립된 것도 조선인의 지식을 향상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선일체사상’을 어릴 때부터 심어놓으려는데 본 뜻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국민학교 교사를 배출해내는 곳이 사범학교였죠. 일제시기 사범학교는 제국주의 선전의 교회였고 사범학교 출신 교사는 제국주의의 사상의 전도사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물론 사범학교 출신의 모든 조선인이 그 전도사노릇을 한 것은 아닙니다).
  박정희는 만주국(일제가 세운 나라)의 만주군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그 덕택에 일본육사를 마치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습니다. 그곳에서 조선인·중국인 항일빨치산(게릴라)을 적으로 삼고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해방--박정희에게는 패전입니다--을 맞은 것이죠. 아시다시피 일본 군인은 군국주의로 일컫어지는 일본파시즘의 꽃입니다. 일제시기 박정희는 제국주의의 전도사이자 일본파시즘의 행동대원으로 살아온 셈입니다.
  일설에 해방 후 박정희는 임시정부의 광복군을 찾아 왔다고 합니다. 그러자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탈출해 광복군이 되었던 장준하선생이 김구선생에게 박정희만은 받아들이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고 합니다. 자발적으로 일본군이 되었고 마지막까지 일본군으로 살아온 박정희를 어떻게 광복군이 받아들일 수 있냐는 거지요. “박정희만은 안된다”라고 외친 장준하선생은 그후 박정희 유신체제에 항거하다 의문의 죽음을 당합니다.

 

  둘째 박정희의 좌익경력 문제입니다. 박정희는 해방후 남로당에 가입합니다. 유사시에 군부 내의 좌익계를 이끌고 무장투쟁을 지도할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순사건 때 김창룡이 이끄는 육군방첩대에 의해 발각·체포되었고, 군부내 좌익의 명단을 불어 목숨을 부지 했습니다. 그가 살아남은 데에는 만주군 출신의 선후배--친일군맥--의 도움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가치관을 떠나서 보자면 박정희는 숱한 동료의 목숨을 판 댓가로 자신의 목숨을 건지는 배신을 한 셈이죠.
  이 사건으로 군대에서 쫓겨난 그는 6·25전쟁을 계기로 다시 군에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5·16쿠테타를 일으키면서 혁명공약 제1조로 “반공을 국시로 한다”를 들고 나왔습니다. 극우로 다시 돌아선 겁니다. 일본군에서 좌익으로 그리고 반공투사로 이어지는 박정희의 끝없는 변신에는 이념이나 가치보다는 개인의 출세욕과 야망이 깔려 있었습니다.

 

  셋째 박정희의 쿠테타문제입니다. 박정희는 ‘구국의 일념’으로 쿠테타를 한 게 아닙니다. 박정희는 일제시기 이미 ‘정치화’된 군인출신으로,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제국주의 파시즘은 군부 주도의 몇 번의 쿠테타 가운데 성립되었고, 대외침략 뿐만 아니라 국가의 모든 정책 또한 군부가 주도했습니다. 일제 파시즘 아래 성장한 ‘군인 박정희’는 군의 정치개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실제 박정희는 4·19혁명 전 세 번이나 쿠테타를 준비했습니다. 4·19가 나자 그가 얼마나 우울해 했는지···· 그리고 4·19 이후 이른바 ‘혼란정국’을 쿠테타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보고 결행한 것이죠. 박정희의 쿠테타가 성공하고 미국 정부가 이 군사정부를 승인-즉시 승인은 아니지만-한 데에는 남한을 강력한 반공기지로 만들려는 미국의 계산이 깔려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쿠테타를 할 당시 사회는 다시 안정을 찾고 있어서 쿠테타의 명분이 사라지고 있었다는 게 대다수 학자들의 의견입니다.

 


2. 박정희(정권)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박정희(정권)를 평가할 때 몇 가지 기준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쿠테타가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이왕 정권을 잡은 이상 박정권이 해야 할-즉 박정권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해야 할- 역사적 과제는 크게 다섯가지였습니다.  먼저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되살리는 일입니다. 전후복구와 경제성장이지요. 둘째 민주적 가치를 회복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셋째 전쟁으로 빚어진 남북의 적대감을 씻고 새로운 통일방안을 마련하는 일입니다. 네 번째로 분단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나라의 자주성을 확립해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전쟁을 통해 반공애국투사로 변신해 우리 사회를 장악한 친일세력들을 척결함으로써 이승만정권, 장면정권이 남겨놓은 친일잔재를 없애고 건강한 새출발을 해야 했습니다.
  박정희는 이 모든 문제에서 경제 문제를 빼고는 빵점-아니 마이너스-이었습니다. 경제문제도 사실 따지고 보면 박정희의 공이라 할 수 없거니와, 경제성장의 이면에 감춰진 어두운 그림자가 경제성장의 그래프보다 더 길게 늘여져 있었습니다. 선생님, 지루하지만 이 문제들을 함께 검토해보기로 할까요.  박정희 찬양의 유일한 ‘트레이드 마크’인 경제부흥론부터 들어가 보기로 하지요.

 

(1) 이른바 고도성장에 대해

 

  첫째 박정희집권 시기 우리가 경제분야에서 빠른 성장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같이 검토되어야 하겠지요. 하나는 경제성장의 진정한 동력은 무엇이었나, 정말 “조국근대화의 위대한 기수”인 박정희의 지도력 때문인가 하는 점입니다. 또 하나는 박정희식 경제개발이 정말 바람직한 것이었나, 성장만큼 부정적인 유산을 남겨 놓았다면 성장만 놓고 평가할 것이 아니라 그 부정적 측면을 함께 평가해야 공정하지 않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이미 제2공화국 때 입안되었던 것입니다. 장면정권은 총투자액 400억원 규모의 ‘국토건설사업’이나 경제개발계획 등을 수립해 놓고 이를 추진하다가 쿠테타로 무너진 거죠. 당시 경제 위기가 워낙 심각했기에 박정희정권이 아닌 다른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경제개발계획은 당연히 추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정희의 경제개발·조국근대화는 2공화국의 경제개발계획을 군대식으로 밀어 붙인 거지요.
  한편 이 시기 미국도 북한의 사회주의체제에 맞서서 강력한 반공국가인 남한을 자본주의 쇼윈도우(전시장)로 만들기 위해 경제 지원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미국은 동북아시아에서 북한·소련·중국에 맞서기 위해 한국과 일본이 공동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박정희에게 한일협정을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한일협정을 통해 한-일 공동반공전선을 구축하고 경제개발의 비용도 좀 챙기라는 게 미국의 요구였습니다. 그리고 박정권은 이를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해서 안보와 경제개발은 하나의 축에 묶여서 진행됩니다.  “싸우면서 일하자”는 박정희식 경제개발 구호는 안보와 경제가 하나로 움직인 것을 의미합니다. 일제가 추진한 전시총동원체제에 가까운 경제정책이었죠. 그리고 점차 안보논리가 경제논리를 지배했고-안보를 위해서는 경제정의 같은 것은 무시해도 좋다는 식이죠-, 안보는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됩니다. 마치 북벌론이 송시열같은 노론지배층의 안보이데올로기로 작용했듯이. 이렇게 볼 때 박정희의 경제정책을 순수하게 경제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것은 정말 위험한 시각입니다.
  박정권이 경제개발계획을 준비하면서 맞닥뜨린 문제는 공장을 짓고 원료를 수입하는 등 경제개발의 착수금을 어떻게 마련하느냐 였습니다. 그래서 졸속적으로 이루어진 게 한일회담과 한일협정이었고, 이 한일협정을 통해 일본측이 제공한 유·무상 30억달러의 각종 ‘경제협력기금’이 경제성장의 착수금이 된 셈입니다. (우리측은 일제 식민지 지배에 따른 피해보상금이라는 의미에서 ‘대일청구권자금’이라고 부르지만, 일본측은 시혜의 의미가 강한 ‘경제협력기금’으로 부르기를 고집했습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박정권은 과거 일제가 저지른 범죄와 민중의 피해에 대한 최소한의 조사도 하지 않은 채 36년의 피해보상을 서둘러 매듭지은 것입니다. 이렇게 조약을 서둘게 된 데에는 한일협정을 빨리 체결하라는 미국의 요구에 떠밀린 상황도 있었죠(한일회담이 우리의 내재적 요구와 주체적인 태도로 진행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점도  때문입니다). 그 결과 지금도 정신대(일본군성노예)문제, 원폭피해자, 재일동포 지위 등 단 한가지도 해결되지 않이 지금까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물론 일본정부는 한일간의 ‘과거사’는 한일협정에서 다 해결했다고 오리발을 내밀고 있는 상황이지요.
  또 하나 문제는 이때 한일협정의 성사를 댓가로 김종필은 거액의 정치자금을 일본으로부터 받아 이 돈을 공화당 창당자금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식민지 청산의 문제가 걸려있는 한일회담에서조차 한국정부가 과거에 대해 전혀 잘못을 느끼지 않는 일본으로부터 뒷돈을 받는 상황은 일본이 한국정부와 한국인을 우습게 보는 계기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한일회담을 계기로 과거 친일경력자들은 ‘일본통’으로 부상하면서 일본의 보수정객과 커넥션을 연결하면서 한일간의 부도덕한 뒷거래가 이루어집니다.
  어떤 학자들은 박정권이 한일협정을 맺은 것을 잘한 일이라고 추켜 세웁니다. 이 때문에 경제성장이 가능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는 중등학생 수준도 안되는 유치한 견해입니다. 박정권은 일제 36년의 지배에 따른 민중의 피해는 덮어둔 채 몇 푼의 돈을 받는 데 급급했습니다. 이는 한국정부 스스로 식민지시기 우리 민족이 입은 피해와 일제만행의 진상을 외면했고, 받을 돈도 제대로 못받았으니 무책임외교, 무능력 외교의 본보기일 뿐입니다. 게다가 공화당창당자금으로 뒷돈을 받는 작태를 벌인 점은 정권의 부도덕성, 반민족성의 싹을 보여줍니다. 미국의 요구에 떠밀려 졸속으로 추진한 점은 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불안정한 박정권이 미국의 요구대로 따름으로써 미국으로부터 쿠테타의 합법성을 구하려는 속셈 아니었을까요. 한일회담은  경제개발의 착수금의 문제를 넘어 박정권이 속성을 미리 보여주는 ‘오멘(불길한 징조)이었습니다.
  박정희가 추진한 경제성장에는 월남전과 독일·중동의 해외 ‘인력수출’이라는 또 다른 성장요인이 있습니다. 일본의 전후 경제성장이 한국전쟁에 힘입었듯이 말입니다. 월남전은 쉽게 말해 프랑스-일본-미국의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려는 베트남민중의 민족해방투쟁입니다. 여기에 미군과 한국군이 침략자로서 들어간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탐나더라도 일제 식민지의 고통을 겪은 우리가 ‘미국의 꼬붕’으로 남의 나라 민족해방운동을 진압하러 가서야 되겠습니까. 더욱이 이때 간 한국인 사병들은 미국으로부터 미군에 준하는 고액의 봉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이들의 돈을 가로채고 보통의 한국군이 받는 일반 봉급-봉급이랄 것도 없습니다- 수준만 주었죠. 쉽게 말해 정부가 우리 군인들한테 가는 봉급의 대부분을 가로챈 것입니다. 그래도 되는 걸까요? 이게 탁월한 지도력인가요?  우리가 월남파병을 어린 세대에게 “경제성장의 동력”, “해외파병을 통한 국위선양”으로만 가르친다면, 현재 일본 우익이 식민지 침략과 ‘대동아전쟁’을 일본 경제를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대화혼(大和魂)의 발휘로 가르치는 것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비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박정희의 경제‘철학’-경제성장론의 핵심은 국가(정부)가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해 경제틀을 짜고 특정기업에 특혜를 주어 육성·지원하는, 국가주도의 경제성장론, 수출중심주의입니다. 흔히 개발독재--경제성장의 효율성을 위해 필요하다면 강력한 권력이 독재를 행사하는 것도 정당화되는--라고 하는데 최근 중국이 이를 주목하고 있답니다. 배울 게 따로 있지 참 갑갑한 노릇입니다.
  박정희의 개발독재는 경제성장의 대가로 일인독재, 재벌의 정경유착과 부실경영, 한국경제의 미일의존성, 부와 소득의 불균형, 농업의 희생, 노동자들의 인간적 권리 말살 등 지금까지 심각한 후유증을 낳았습니다. 두어가지만 볼까요. 국가의 비호 속에 자란 재벌은 한편으로 국가의 지원 속에 성장을 거듭하면서 그 대가로 막대한 정치자금을 정부에 갖다 바쳤습니다. 보기를 들어 정부가 특정 사업을 설정하고 특정 기업에 사업권을 넘겨 주거나, 은행에 압력을 가해 특정 기업에 거액의 융자혜택을 줍니다. 그 기업은 그 대가로 거액의 뇌물(리베이트)를 정치자금으로 헌납합니다. 서로 공생관계이지요. 이를 정경유착이라고 합니다. 자칭 ‘박정희의 신도’라도 하는 전 중앙정보부장(국가정보원장) 이후락은 “떡을 만지다보면 떡고물이 묻기 마련”이라고 변명했지만 말입니다. 기업은 거액의 정치자금 때문에 공사비를 적게 들이다보니 부실공사가 나오는 거지요. 결코 기술 탓은 아닙니다.
  부동산투기열풍은 거액의 정치자금을 마련하고 치부하는 상습수단이었습니다. 개발지역을 권력자들은 미리 정하고 이를 싼 값에 미리 사들입니다. 그 후 개발지역 발표를 해 땅값이 오르면 크게 이익을 남기는 거죠. 이런 이권 챙기기가 권력 차원에서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진 게 박정희정권 때입니다.
  아울러 박정권은 저임금정책 장시간노동정책을 지지하고 노동자의 인간의 권리는 일체 박탈해--노동자가 자신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 권리조차 없었습니다--, 이 덕택에 기업은 노동자들의 피를 빨아먹으면서 성장했습니다. 70년대 한국 노동자들이 어떠한 상태에 살았는지는 7,80년대에 나온 노동자들의 수기 특히 전태일의 일기가 잘 말해 줍니다. 한번 읽어보십시오. 1987년 7,8월 노동자파업 때 가장 많이 나온 요구조건 중 하나가 “노동자도 사람이다. 머리를 기르게 해달라였습니다.” 경제성장의 진정한 주체인 노동자는 이런 대접 속에 살아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재벌 때문에 겪는 국가적 위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은 정치와 너무 깊이 결합되어 있어 구조조정이 불가능한 실정입니다. 다 박정희가 뿌려놓은 씨앗들이 자라난 거죠. 김영삼만 탓해서는 안됩니다.
  아참, 저축문제를 뺄 수 없군요. 어럴 때 기억나시죠? 교실 뒤 빨간 막대그래프와 우체국 저금통장. 강제에 가까웠기에 논란은 되지만 저축 장려 그 자체는 저도 ‘자본의 원시적 축적’의 한 형태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1970년대 말 어느 여성노동자가 ‘저축왕’으로 뽑히어 새마을보고대회에서 발표를 하는데 그게 좀 문제가 있더라고요.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국민학교를 간신히 마치고 집안과 남동생의 학비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서울로 무작정 상경해 ‘식모살이’를 거쳐 공장에 들어간 일까지는 그당시 흔한 일입니다. 돈을 모으겠다는 마음으로 악착같이 저축을 했답니다. ‘세끼밥을 다 먹으니 저축할 돈이 없어서 처음에는 점심만 거르다가 마침내 또 한끼는 라면으로 줄여 십 년 까까이 돈을 저축했더니 돈이 좀 모이더라. 배가 고파 쓰러지기도 했지만 그 결과 오늘의 내가 있게 되었다.’ 그 여성노동자가 십년 가까이 저축한 돈은 요즘으로 치면 천만원이 훨신 못되는 것이었습니다. 노동자의 저축은 그렇게 오래 걸렸습니다. 잔인한 저축입니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저축을 할려면 한끼 정도 먹어야, 즉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먹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줄뿐더러, 박정희 집권 시기 정부와 기업이 이땅의 노동자를 얼마나 저임금으로 울궈먹었는가를 보여줍니다. 물론 이 여공의 발표를 들으면서 박정희는 눈물을 훔쳤습니다. 그러나 저임금정책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새마을운동은 단순히 경제적 측면에서만 바라보면 큰일납니다. 오히려 박정희를 지지하는 지역 기반을 농촌에 구하고 정치적으로 낙후한 농민들을 동원,통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치 1930년대 조선총독부가 내세운 ‘농촌진흥운동’이나 ‘신촌(新村)운동’ 그리고 ‘농촌중견인물양성책’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농촌주택을 시멘트로, 슬레이트로 바꾼 것도 당시 시멘트수출이 부진하자 내수시장(농촌)에서 시멘트 소비하기 위한 것 아니었을까요. 무엇보다. 농촌이 살기 좋아졌다면, 왜 수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야 했고, 농민운동은 박정희 때부터 타오르기 시작했을까요. 농협이 권력의 시녀로, 착취기구로 악명을 떨친 것도 새마을운동시대입니다. 새마을운동은 그 성과-농민의 삶이 향상되었다기보다는-사업 그 자체가 갖는 대내외의 거대한 선전·동원기능에 주목해야 합니다. 일제시기 일제 파시즘이 어떻게 국가와 농촌을 연결시키고 이를 파시즘의 동원메카니즘으로 활용했는지 살펴본다면, 새마을운동의 본질을 좀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새마을운동은 아직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이런 정도의 추측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무엇보다도 박정희는 안보와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인간의 모든 가치가 유보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을 오직 빵만으로 사는 동물적 존재로 돌려버렸습니다. 근로기준법은 있었지만, 실제 근로기준법이 보장한 8시간 노동제나 노동3권(단체결성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국가를 위해 산업전사로서 묵묵히 일만 하라는 것이죠. 어느 노동자 시인은 이렇게 갈파했습니. ‘그래 우리는 산업전사다, 산업현장에서 싸우다 죽으라는 소모품이구나.’ 박정희가 민주화를 훼손시켰지만 경제성장의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인간의 모든 가치를 희생해도 좋은가라는 논쟁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그가 이루어놓은 경제성장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굴욕적인 한일협정이, 저임금 장시간 중노동에 시달린, “공돌이와 공순이로 천대받던” 노동자의 피와 눈물이 새겨져 있습니다. 고도성장의 금자탑 아래 월남전에서 쓰러져간 젊은이들의 피가 흥건이 고여있고, 고엽제 휴유증에 시달리는 수만명의 참전용사의 신음이 배여 있습니다. 한국 경제의 성장을 얘기한다면 그 공로는 마땅이 이들에게 돌려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 조차 받지 못한 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박정희에게만 비춰지고 있습니다. 경제성장의 공을 특정 개인, 지도자에게 돌리는 것은 영웅주의사관일 뿐만 아니라, 사실도 다릅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혹사당할 때 자칭 조국근대화의 선구자들은 그 성장의 과실과 훈장만을 따먹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오적(五賊)”이라고, 또 그들이 살던 동네를 “도둑촌”이라 부르지 않았습니까? 박정희가 서민적인 대통령이었다는 말은 노태우가 보통사람이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박정희는 권력 초기는 텁텁한 막걸리로 시작했지만, 궁정동의 마지막 밤은 양주 ‘시바스 리갈’로 끝났습니다. 월남전 사상자 보상금 12억 달러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으며, 1980년 신군부가 다시 쿠테타를 하면서 발견했다는, 60억 달러가 넘는 스위스은행의 박대통령 비자금이야기는 도대체 무엇을 말해 주는 걸까요? 박정희 평가는 성숙해야 한다, 그러니 비판만 하지말고 경제성장측면을 같이 평가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평가’라면 당연히 이렇게 되어야 하겠지요. “그래 박정희는 경제성장을 볼모로 너무나 많은 인권유린과 부정부패가 있었어. 앞으로 우리는 경제성장을 하더라도 그러지 말자.”

 

(2) 박정희와 친일파 문제

 

  박정희의 집권은 친일파들이 권력의 심장부에 영구히 자리잡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박정희의 일제시기 행적과 맞물려 일제 친일잔재 세력은 그의 품안에서 조국근대화의 기수로 때로는 박정희 신도로 자처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보호막을 안정적으로 갖게 되었습니다(물론 친일파가 살아남아 권력을 쥐게된 연원은 미국과 이승만정권에게 있습니다만). 그리고 이들은 친미파로 변신하고 자주국가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과 주체성 마저 훼손시켰습니다.
  이들은 일제시기 비민주적인 악법과 다양한 식민지적 제도와 관행을 그대로 남겨두었고, 특히 친일문제를 누가 거론하면 알게모르게 탄압을 해 과거 역사를 제대로 알고 바로잡는 계기를 원척적으로 봉쇄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역사학계에서 친일파연구는 거의 자유롭지 못합니다. 직장에서 쫓겨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실제 작년인가 그런일이 일어났고요. 이 때문에 식민지 잔재는 박정희 때 오히려 강화되는 반면 친일문제는 기각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최소한의 역사의식과 가치관 마저 대중적으로 확립될 수 없게 된 거죠.
  친일파들은 일제 시기 자신의 부일협력을 ‘계몽운동과 문명개화의 선구자의 고뇌’로 정당화했습니다. 해방 후 이승만분단독재정권에 충성한 것과 6·25전쟁에서 ‘타공전선’에서 활동한 것을 두고 자신을 건국운동의 애국지사, 반공애국투사로 자화자찬하기를 마지 않습니다. 그리고 박정희정권에 빌붙은 것을 조국근대화의 기수로 미화하고 있죠. 나아가 이들은 자신의 닮은꼴인 박정희를 최종적으로 부활·기념시킴으로써 역사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역사를 왜곡하는 공개적인 거대한 사기극이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거죠. 최근에는 자신들을 아예 21세기 미래의 민족지도자상으로 각인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근대화(황제께서 탁월해 자주적으로 근대화의 서막을 열었다)-->일제의 식민지근대화(일제가 근대화를 시켜줬다)-->개발독재/근대화혁명(급속한 경제살리기를 위해서는 독재도 때론 용인될 수 있다. 박정희는 독재자라기 보다 혁명가다)” 라는 기괴한 역사발전론으로 연결됩니다. 박정희평가는 이러한 노선에 있었던, 늘 양지만을 찾아다닌 이 인간군상들의 삶을 긍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 하는 20세기 한국의 아마겟돈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승리한 쪽이 21세기 우리 민족의 주도적인 가치로 자리잡을 것입니다.

 

(3) 유신체제 : 국가주의와 총체적 후진성의 구조화

 

  독재정권은 나쁘다는 게 정치학의 상식이니까--요즘 우리 분위기를 볼 때는 정말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약간 다른 각도에서 유신정권을 평가해 보기로 하죠.
  먼저 유신체제를 성립시킨 시월유신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시월유신은 박정희 일인영구독재를 위해 남북통일문제를 최악으로 활용한 희대의 사기극이었습니다. 박정희는 종신대통령을 해야 겠는데 명분이 없자, ‘경제성장의 완수’와 ‘남북통일문제’를 이용했습니다.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책임자인 이후락을 김일성에게 밀사로 보내 그 결과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합니다. 온 국민이 열광했습니다. 드디어 남북의 지도자가 무력대결을 버리고 평화적·자주적·민족대단결의 통일의 물꼬를 틔었다고 기뻐했습니다. 김대중대통령이 꿈꾸는 노벨평화상은 문제도 아니었지요. 그러나 100일 후 박정희는 통일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10월유신을 단행합니다. 북한도 발맞추어 주석제를 실시합니다. 통일은 철저하게 남북지도자의 권력유지에 이용되었고, 국민은 배신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봉건시대 왕보다 훨씬 강력한 권한을 가진 지도자가 남한에서 탄생합니다. 사실입니다. 박정희는 왕 이상이었습니다. 그후 남북은 오히려 7·4공동선언이 무색하게 적대적인 경쟁으로 치닫게 되었죠. 박정희는 반통일주의자였습니다.
  시월유신은 일본제국주의의 군사적 국가주의(파시즘)의 1970년대 ‘한국식 업그레이드판’이었습니다. 한국사회에 국가주의를 구조적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이었죠. 이시기 박정희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정책은 그 기본성격이 일본제국주의 시절에 그가 훈련받은 군국주의적(파시즘적) 사고방식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박정희는 한일회담을 전후해 자신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감동받은 바가 많으며 한국도 이를 모델로 ‘제2의 메이지유신’을 하는 심정으로 국가를 일으키겠다고 해 일본의 노정객들을 흐뭇하게 했습니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떠났지만 그들이 뿌려놓은 씨앗이 열매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시월유신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 보기로 할까요.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정도가 아니라 군국주의·국가주의로 우리 사회를 재조직해 총체적인 후진성을 구조화시켰습니다. 선생님도 잘 아시겠지만 우리는 조선 중세봉건왕조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즉 시민혁명을 거치지 못한 채 일제의 식민지로 노예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해방이 되어도 민주주의 훈련을 받지 못해 제대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어려웠죠. 해방 직후의 정치적 혼란과 이승만독재정권과 전쟁, 짧았던 장면정권을 거쳐 그나마 박정권 때라도 차근하게 민주주의를 실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로 갔습니다. 박정희는 일제시기 제국주의 군인정신에 입각해 4·19의 성과를 짓밟고 일제의 국가주의를 자신의 독재를 유지하는데 철저하게 적용했습니다.
  4·19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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