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둘째 출산으로 정신이 없어서 미뤄둔 북방한계선(NLL) 관련 뉴스들을 살펴봤다. 진실공방을 확인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보였다. 그래서 어제 밤늦도록 민주당 윤호중 의원이 공개한 ‘서해평화협력 특별지대’ 지도 관련한 글들과 국정원이 공개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전문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정상회담이 이런 식으로 공개되었다는 것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4시간 분량의 남북 정상간의 대화를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건 어떤 영화를 보는 것보다 은근히 떨리고 흥미로웠다. 물론 긴장감은 오래가진 않는다. 김정일 위원장이 이슈와 관계없는 뻘소리를 많이 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역대 대통령들에 대해 가능한 한 객관적인 관점을 가지고자 노력하는 중이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호불호도 아직 명확하지 않은 상태...지만, 대화록을 통해 느껴지는 노무현 대통령의 남북관계에 대한 열정만큼은 높이 사주고 싶다. 누구든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도, 남북관계를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북한 정상을 열렬히 설득하려고 했을 대통령은 없었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다만, 대충 큰 그림만 얘기하고 디테일은 아랫사람에게 맡기고 싶어하는 김정일 위원장과는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는 커플인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ㅋ. 조금이라도 이번 북방한계선에 대한 관심이 있는 분들은 국정원 공개판이긴 하지만 이 대화록을 전문으로 꼭 읽어보시길, 안되면 적어도 훑어라도 보시길 강권한다.
우선 등면적 공동어로구역부터 살펴보자. 북방한계선의 문제에 대한 보수의 우려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사실상의 해상국경선으로 수십년간 유지되어온 북방한계선을 어떤 형식으로든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보수로서는 당연한 관점이다. 특히나 지난 대선 때 논의가 되었던 등면적, 그것도 북방한계선 기준으로 남쪽의 강화도 및 인천앞바다와 북쪽의 장산곶(백령도 북부)을 서로 맞바꾸자는 식의 서해공동어로구역 기획은 보수뿐만 아니라 중도파조차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었을 것이다. 진중권이 변희재에게 사망유희에서 완패한 부분도 이 부분이다. 변희재는 바로 이 인천앞바다를 내준 등면적 공동어로수역안이 참여정부의 북방한계선 계획이라고 주장하면서 인천 앞바다를 내주는 게 NLL포기가 아니면 뭐냐고 주장했고 진중권은 답변하지 못했다. 또한 지난 10일 국정원 대변인 성명에서 제시된 지도에는 백령도 인근 한국군 군함이 북측이 제시한 해상군사경계선 이남으로 내려와야 하는 것처럼 나와있다.
위의 변희재나 국정원 대변인 성명이 맞다면, 나도 참여정부의 등면적 공동어로구역에 동의할 수 없었을 거다. 그러나 얼마 전 윤호중 의원이 공개한 “남북공동어로수역 등면적안 지도(정상회담 후속조처로 남북국방장관회담에서 우리측이 제안한)”에는 걱정한 것과는 달리 강화도나 인천 앞바다엔 공동어로수역이 설정되어있지 않았다. 또한 백령도 주변어장은 공유하지도 않으며 한국군 군함이 북측이 제시한 해상군사경계선 이남으로 내려가지도 않는다. 따라서 변희재의 인천앞바다 공동어로구역 설정안이나, 국정원 대변인 성명에 첨부된 남북공동어로구역 지도는 다른 설명이나 근거자료가 없다면 거짓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실제로 서해공동어로수역은 노태우 대통령 시절부터 논의되어오는 사안이라고 한다. 참여정부 전까지 역대 정부는 모두 북방한계선 기준 ‘등거리’를 논의해왔는데 (이 제안은 북측이 거부함), 노무현 대통령이 보수세력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등면적’ 논의를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에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무역항이 발달한 해주를 얻고 싶었다. 개성은 기반시설과 노동력 등에 한계가 있었고, 물류 운반에도 제약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계, 조선, 중화학 공업위주의 대규모 공단이 들어설 수 있는 경제특구 추가 개발이 북한의 개방과 남북한경제협력을 위한 최우선 사안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서해에 해주-개성-인천을 잇는 세계적인 공단을 만들고 싶었다. 원하는 게 있다면 그 가격을 치뤄야 하는게 거래의 기본. 대화록을 보면 김정일은 이 해주에 대한 대가로 “서부지대 바다문제”를 거론한다.
이 거래를 어떻게 할 것인가. 강경보수는 북방한계선은 절대 건드릴 수 없다는 입장일 것이고, 급진좌파는 불확실하지만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남북간에 합의된 바 없는 북방한계선은 무시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여러 스펙트럼 중에 중도좌파의 입장을 골랐다. 해주를 얻고 “서부지대 바다문제”를 양보하되, 북방한계선을 중심으로 한 등면적 공동어로수역안으로 양보를 최소화한다는.
과자를 100원주고 샀는데, 누군가 과자 얘기는 빼놓고 너는 100원을 버렸다고 한다면 어이가 없는 일이다. 서상기, 정문헌 의원 그리고 김무성 선대위원장이 그렇다. 해주를 특구로 만들겠다는 약속의 대가로 북방한계선을 양보했는데, 해주 얘기 없이 북방한계선을 포기했다고 말한다는 건 어이가 없는 일이다. 게다가 북방한계선을 양보했다기 보다는, 북방한계선을 그대로 두고, 그것을 기준으로 군대가 아닌 경찰이 관리하는 네 곳의 등면적의 공동어로구역을 설정한 것, 그것도 지금은 민간어선이 드나들 수 없는(그래서 중국어선이 드나드는) 해상 DMZ같은 합참통제선 내의 수역을 북한에게 개방한 것을 북방한계선을 포기했다고 해석했다면, 이데올로기에 눈이 멀었거나,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북한에게 개방될, 북방한계선 남쪽 공동어로수역의 안보문제나, 해주 특구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 걱정하는 보수의 비판은 일리 있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보고 대통령이 북방한계선을 포기하는 이적죄를 지었다는 보수의 비난은 허용될 수 없는 왜곡이요,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2007년 정상회담 내용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남재준 원장의 국정원과 국방부가 왜곡된 북방한계선 포기입장을 옹호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게 한다.
모든 것의 발단은 선거로 돌아간다. 북방한계선 논란은 원세훈 원장의 국정원 선거개입 사태에 물타기 위한 의도라는 것은 합리적 의심으로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국정원 선거개입을 덮기 위해 터트린 북방한계선 문제도 선거공작용 기밀문건유출 사건으로 부메랑이 되어서 새누리당으로 돌아가고 있다. 오늘자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선거불복이 문제’라는 일면 기사는 새누리당의 역풍우려에 대한 반증이다.
나는 선거에 불복하길 원하지 않는다. 다만 대한민국 선거에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이 낱낱이 밝혀지고, 또 의혹들이 조작된 것이라면 그것도 명확히 밝혀져 차후에 절대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러니 국정원의 선거개입, 나아가 총체적인 관권선거의 징후들이 제대로 밝혀져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이 유지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때까지 우리는 연예병사의 안마시술소나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은 전두환 자택 압수수색 같은 (이건 제발 물타기가 아니길 바란다) 또 다른 물타기에 현혹되지 말고 끝까지 가장 중요한 질문을 잊지 말아야 한다.
관권선거는 있었는가?
있었다면 어디까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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