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합시다’라는 <시사IN> 신년 강좌 타이틀은 사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에게 빚지고 있다. 청와대 행정관, 선거 전략가, 정치평론가 등으로 정치 현장을 지켰던 그가, 정치라면 고개부터 내젓는 대중에게 말을 걸기 위해 지난해 펴낸 책이 <뭐라도 합시다>였기 때문이다. 불통 대통령과 무기력한 야당의 틈바구니에서 대중의 정치 불신 내지 혐오 정서가 갈수록 짙어지고 있는 오늘, 그가 꺼내든 처방은 무엇일까. 1월19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절망의 정치를 넘어’라는 주제로 진행된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오늘 주제가 ‘절망의 정치를 넘어’인데, 먼저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 국회의원이 지금 300명이다. 국회의원들을 보고 있으면 하나같이 잘났다. 박사에, 교수에, 스펙 좋고 평판 좋은 이들이다. 그뿐인가. 총선 때만 되면 이들 중 50% 이상이 물갈이된다. 그런데도 여전히 정치는 철저하게 불신의 대상이다. 정치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정당이 생겼다 깨지고 온갖 연대가 등장하는 일이 반복돼도 도통 정치가 좋아지고 있다는 체감은 없다. 도대체 왜? 이를 두고 정치학자들은 말한다. 정치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고.
아시다시피 정치라는 게 존재하는 이유 내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1인1표’ 시스템에 있다. 모든 유권자에게는 동일하게 한 표가 주어진다. 재산이 많건 적건, 학식이 많건 적건 관계없이 무조건 한 표다. 완벽한 기계적 평등에 따라 등가성의 원리로 움직이는 것이 정치다. 반면 자본주의나 시장경제는 ‘1원1표’ 시스템에 의해 움직인다. 백화점에 가면 10만원짜리 소비자냐, 1000원짜리 소비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대접을 받는다. ‘1인1표’의 민주주의 원리로 작동되는 정치와 ‘1원1표’의 자본주의 원리로 작동되는 시장은 궁극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때 필요한 것이 정치다. 정치가 제 기능을 발휘하면 이 같은 시장 질서에 개입해 어느 정도 교정을 할 수 있다.
정치가 제 기능을 발휘할 때 더 좋은 사회, 살기 괜찮은 사회가 만들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 사회가 좋아지고 나빠지고는 정치의 질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제러미 리프킨이 말하길, 아메리칸 드림의 시대가 가고 유러피안 드림의 시대가 왔다고 했는데, 미국이 살기 좋은 나라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것이다. 복지 혜택을 골고루 누리는 스웨덴 사람들과 달리 미국 사람들은 극심한 빈부격차 속에서 가난을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며 살지 않나. 대한민국 사회도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내가 못사는 걸 내가 열심히 하지 않은 탓, 부모 잘못 만난 탓으로만 돌릴 것인가? 그런 개인적 해법 말고 달리 강구할 수 있는 수단이 정치다. 내가 상대와 똑같은 한 표를 갖고 있다는 것, 이것이 무기다. 상대를 설득해 내 편으로 만들면 내가 다수가 될 수 있다. 다수를 이룬 세력이 정치권력을 잡고 시장의 권력관계를 바꿔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정치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일단 정치라는 것 자체가 여러분의 것이 아니다. 정치의 경우 그것을 전담하는 정치인이라는 직업이 있다. 정치권이라는 단어는 더 막연하다. 국회의원 300명? 아니면 직업 정치인? 뭐가 됐든 정치가 유권자 것이 아님을, 여러분 손에서 벗어나 있음을 못 박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정치권’이라는 용어다.
게다가 정치는 지저분하고, 협잡이 난무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누군가 “쟤는 정치적이야”라고 하면 당사자에게 굉장한 오명이 된다. 정치 한다는 사람들이 모인 정당 논평에서조차 검찰이 욕먹을 짓을 하면 ‘정치 검찰’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웃음). 물론 이해는 된다. 유권자 처지에선 저 사람을 찍었을 때 뭔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어야 투표할 맛이 날 것 아닌가. 그런데 누가 되든 똑같다? 그렇다면 투표장에 가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하다. 그게 여러분 탓은 아니다. 유권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라고 말하기 전에 유권자의 이해와 요구를 담아낼 수 있는 정치세력이 제대로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세력이 정당이라는 그릇에 담겨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다. 좋은 정당이 있어서 괜찮은 선택지를 제공한다면 유권자도 그 정당이 뭔가 세상을 바꾸려 할 때 힘을 몰아주고 싶을 텐데, 현재는 그런 정치나 선거의 메커니즘이 끊겨 있지 않나.
ⓒ시사IN 윤무영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은 “정치의 질이 곧 그 사회의 질을 결정한다”라고 강조했다.
정치 불신은 누구에게 유리한가
단,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정치는 나쁜 것이라고, 그러니 관심 갖지 말고 정치를 잊으라고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과연 누구인가. 이른바 반정치 정서 또는 정치 불신을 끊임없이 부추기고 조장하는 사람들이 누구냐는 것이다. (청중석에서 “보수 정당이요” “보수 언론이요” 등의 답변)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정치는 1인1표의 민주주의에 기반한 시스템이다. 반면 시장질서는 기본적으로 돈을 중심으로 짜인다. 가진 자는 큰소리치고, 없는 자는 자기 할 말을 못하게 돼 있다. 예를 들어 거리에서 레슬링 선수와 초등학생이 싸우고 있다 치자. 레슬링 선수는 지나가던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한 소리씩 하는 게 싫다. 반면 초등학생은 어떻게든 구경꾼들을 불러 모아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맞아죽을 테니까. 이렇게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맞부딪쳤을 때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누가 옳고 그른지를 가리는 게 정치다. 그런데 강자는 이를 원치 않는다. 정치가 활성화되고 국회의원 머릿수가 늘어나는 걸 원치 않는다. 그랬다가는 자꾸 뭔가가 부당하다 하고 이를 바꾸자 할 테니까.
이를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게 신자유주의다. 신자유주의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두 가지 속성이 ‘반정치’와 ‘반노동’이다. 정치와 노동이 활성화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대표하는 레이건이 조종사 노조를 박살내고, 대처가 광부 노조를 박살낸 건 우연이 아니다. 두 정권을 거치면서 노조의 힘은 현저히 약화됐다. 심지어 블레어는 총리가 된 뒤 “나는 정치인이 아니다”라고 했다. 자신은 한번도 정치인으로 살아본 적이 없다면서 현안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탈정치화라 했다. 웃기지 않나? 실제로는 대처리즘을 그대로 받아들여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갔으면서.
정치 시스템의 장점이자 단점은 여러분이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든, 참여하지 않든 유권자의 삶을 제어하고 규정하는 법규 내지 결정이 끊임없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치가 갖는 함정이다. 정치가 한심하고 형편없을수록 유권자는 투표장을 찾지 않는다. 그래봐야 바뀔 것이 없으니, 유권자로서는 이 편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여러분의 삶을 규정할 결정은 끊임없이 내려지고 있다. 투표를 안 한 사람은 아예 카운트 대상에서 빠진 채 나머지 사람끼리 모여서 모든 것을 결정한다. 곧 여러분이 참여를 덜할수록 강자가 자기 몫을 더 많이 챙길 수 있는 구조가 공고해진다는 뜻이다.
여러분이 참여하지 않을 때 과연 여러분에게 유리한 결정이 내려지겠나. 당연히 아닐 것이다. 내가 그간 정치권을 지켜본 바에 따르면, 정치인은 유권자를 우습게 본다. 그들의 심성이 나빠서가 아니다. 한번 묻자. 자기 지역에 출마한 국회의원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분? 그 사람이 어떤 입법에 표결했는지 아는 분? 거의 없지 않나. 이러니 정치인들이 유권자를 두려워하겠나. 자기가 누구인지, 잘했는지 못했는지도 모르는 채 표를 주거나 아니면 기권하는데. 현재로서 정치인 처지에서 유권자에게 투자하는 건 투자비용이 아닌 매몰비용일 뿐이다.
미국의 오픈 프라이머리 제도를 연구한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이 제도를 도입한 결과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효과가 정당의 약화란다. 정당이 약해지면 유권자 의사를 대변하는 기능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 빈틈을 메우는 것이 언론이다. 언론이 전하는 정치인의 스펙에 유권자들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게 된다. 여론조사로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지 않냐고? 착각이다. 여론조사가 득세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언론이 받아쓰기 좋게 숫자화된 여론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조건 인지도 높은 사람이 유리하게 돼 있다. 요즘 다들 종편에 출연하려고 난리인 것도 이 때문이다. 정치인 처지에서 정당은 중요치 않다. 정강이나 정책을 따지기보다 ‘내게 공천 주는 당=내 정당’이 되는 것이다. 이를 봐야 하는 유권자는 짜증이 난다. 실은 정치인도 여러분 보면 짜증이 난다(웃음). 서로가 투명한 (불신의) 만리장성을 쌓고 있는 것이다.
ⓒ연합뉴스
무상급식 등 먹고사는 문제는 이슈 파급력이 크다. 위는 무상급식 반대를 호소했던 오세훈 전 시장.
차선 내지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현행 선거제도
이런 정치에서 여러분이 희망을 발견하기란 매우 난감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걸 바꿔보겠다는 희망을 놓아버리면 대한민국은 정말 후진 사회가 된다. 보수냐 진보냐, 누가 권력을 잡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사회 전반의 시스템이 좋아져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지금의 정치 제도로는 이것이 매우 어렵다. 일단 보수-진보 구도를 보자.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똑똑하다. 따지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진보는 그럴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것이 진보다. 미래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만큼, 이를 그리기 위해서는 더 정밀하게 따져야 한다. 반면 보수는 현실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다. 현실은 당장 눈에 보이는 만큼 의견 차이가 생길 일이 거의 없다.
이렇다 보니 ‘진보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는 말도 생겨났는데, 이 같은 분열이 다양성으로 승화된다면 이는 진보의 강점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지금의 선거제도가 다양성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현행 지역구 선거제도는 단순다수제다. 1, 2등만 살아남고 3, 4등은 표를 갈라 먹었다고 끊임없이 욕을 먹게 돼 있는 구조다. 이런 제도 아래서는 끊임없이 연대나 단일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분열하면 무조건 지게 돼 있으니까. 유권자도 내가 꼭 찍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차선 내지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곤 한다. 소선거구제도 그렇다. 지역구를 쪼개놓을수록 발생하는 문제가 전국적(national) 이슈를 만들기 어렵다는 점이다. 현행 소선거구제 아래서는 국회의원 선거에 나온 후보가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해 이런 이런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기 어렵다. 곧, 정치를 통해 시장의 문제점을 보완하려는 후보, 강자들의 부당함을 제어하려는 후보보다 자기 지역에 더 많은 예산을 끌어올 수 있는 친자본적인 후보가 당선에 유리하게끔 돼 있는 것이다.
이걸 바꿔보자고 내각제며 이원집정제 논의가 나오고 있기는 하다. 단, 최근의 개헌 논의에는 문제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의 개헌은, 말하자면 집권 의지를 상실한 개헌이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서 개헌에 찬성하는 사람들을 잘 보시라. 대선에 나갈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다. 문재인·박원순처럼 가능성이 높은 주자들은 말을 아끼거나 침묵하는 중이다. 새누리당 또한 앞서가는 주자가 없으니 개헌하자고 하는 것이다. 심지어 박근혜 대통령도 지금은 개헌을 반대하지만 총선이 지나면 달라질 수 있다. 퇴임 이후를 준비하려면 대통령제보다 내각제가 훨씬 유리하니까. 게다가 대놓고 이런 얘긴 안 하지만, 대한민국 보수가 가장 닮고 싶은 모델은 일본인 것 같다. 일본처럼 보수가 안정적으로 장기 집권할 수 있는 시스템을 지향하는 것이다. 야당도 여기 크게 반대하지 않는 분위기고. 개헌하기 매우 좋은 조건이 성숙되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결국 유권자가 나설 수밖에 없다. 유권자가 제대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장치를 만들어내야 한다. 사사건건 촛불을 들거나 직접민주주의를 하자는 게 아니다. 그러면 피곤해서 못 산다(웃음). 그럼에도 정치를 멀리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유권자가 정치를 멀리함으로써 정치가 좋아지는 일은 없다. 한 정치학자가 ‘페이퍼 스톤’이라는 표현을 쓰던데, 표가 바로 ‘짱돌’이다. 여러분이 표를 던져 얼마든지 정치인에게 충격을 줄 수 있다. 여러분이 주인으로서 권력을 행사할 때 직업 정치인들이 여러분을 두려워하게 되고, 정치도 유능해진다. 정치의 질이 곧 그 사회의 질을 결정한다는 얘길 다시 한번 강조한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정치인들을 지켜보고 평가하고 점수 매기는 일들이 일상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대한민국 정치를 바꾸는 유일한 방법이다.
정리·녹취/김은남·김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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