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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남자현 지사

by 아잘 2014.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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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영양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독립운동가인 남자현 지사의 복원 생가가 있다.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생가가 주인을 잃은 채 홀로 앉아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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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2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인 남자현(南慈賢) 지사가 '서거'한 날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때는 지금부터 80년 전인 1933년 8월 22일. 일제의 만주국 전권대사 무등신의(武藤信義)를 '처단'하려다 체포되어 하얼빈 감옥에 갇혔고, 고문과 단식투쟁의 후유증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풀려난 뒤 이내 숨을 거두었다.

남자현 지사는 흔히 '여자 안중근'이라 불린다. 그런 별명을 얻은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1931년의 '거사'이다. 만주사변 조사차 국제연맹 파견단이 중극을 방문했다. 그때 남자현 지사는 왼손 무명지를 잘라 흰 천에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 쓴 다음, 잘려나간 손가락과 함께 싸서 조사단에 전달했다. 그만큼 그녀의 독립투쟁 의지는 강건하였고, 그래서 '여자 안중근'이라는 이름으로 얻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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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현 지사의 복원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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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현은 1873년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서 통정대부(정3품) 정한공의 셋째 따님으로 태어났다. 부모님 슬하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성장하였는데, 19세이던 1891년 영양군 석보면 답곡리에 거주하는 의성김씨 김영주(金永周)와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남편은 1895년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싸우다가 1896년 청송진보지역전투에서 전사한다. 애당초 남편의 의병부대에 함께 참여했던 그녀는 그 이후 시어머니와 유복자를 돌보기 위해 생업을 꾸려가며 민족계몽운동을 펼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복자 김성삼(金星三)을 데리고 만주로 건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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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현 지사 항일 순국비가 생가터 왼쪽 빈터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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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3품의 여식이라면 대단한 거족 집안의 '공주'급 딸이다. 하지만 남자현은 24세 때 의병 전투로 남편을 잃고, 마침내 유복자를 데리고 만주로 가서 여성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게 된다. 그가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람들이 그를 '여자 안중근'이라 부르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말이다. 민족과 나라를 위해  20대 나이에 유복자를 등에 업고 독립운동의 사지에 뛰어든 여인에게 경외감을 품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만주에서 그녀는 재만(在滿)조선여자교육회를 설립하여 여성 계몽 운동에도 앞장선다. 그러던 중 1927년에는 길림의 안창호 연설장에서 47명의 독립지사가 체포되는 위기를 맞았을 때, 그녀는 중국 당국과 교섭하여 전원 석방되도록 하는 업적을 이룩한다. 그 일로 지사의 명성은 중국 사회에도 널리 알려졌고, 이윽고 1931년 단지와 혈서 전달의 극한 투쟁을 맞이한다.

1933년 3월 1일, 일제가 중국 동북지역을 강점하고 괴뢰정권을 세운 1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를 열자, 그녀는 일제의 만주국 전권대사 무등신의를 '처단'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채 체포된다. 혹독한 고문은 뻔한 일이고, 그녀는 단식투쟁으로 항거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사경에 빠졌고, 출옥하였으나 8월 22일 하얼빈 조선여관에서 순국(당시 61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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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가 오른쪽에 지사를 기리는 사당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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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1962년 3월 1일 그녀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영양군은 1999년 11월 30일 지사가 출생한 자리에 본채와 부속사를 복원하였다. 2년 7개월 동안 '무단'으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군사정권이 1963년 12월 17일 법적으로 대통령 자리에 앉기도 전에 '부랴부랴' 남자현 지사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는 사실이 흔쾌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그 때문에 지금처럼 생가가 복원되고 사당도 유지되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서, 참으로 마음은 착잡하다.

현재 부속사는 경로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도 부속사의 경로당 활용은 빈 집으로 남겨둔 것보다는 훨씬 바람직한 일로 보인다. 보통의 문화유산 건물들처럼 지키는 이도 돌보는 이도 없이 방치되어 언제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주는 것보다야 나을 법하기 때문이다. 한옥은 사람이 살면 1천년, 살지 않으면 1백년을 간다는데, 경로당 어른들이 살뜰하게 보살핀다면 남자현 지사의 집도 그 중간쯤인 500년은 무탈하게 모습을 유지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물론  남자현 지사 유적지는 복원된 생가를 둘러보는 것이 핵심이다. 부속사는 말 그대로 부속사이니 역사유적이나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부속사 앞을 지나 수십 걸음만 올라가면 나오는 사당은 반드시 답사자가 들러야 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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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당 안에서 보는 남자현 지사의 (사진을 확대한)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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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서원이나 향교 등 누군가를 배향하는 곳은 참배가 최종 목적이자 목표이다. 절을 해야 한다. 절을 많이 하는 곳이기 때문에 '절'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사찰의 어원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서악서원에서는 으레 김유신, 설총, 최치원을 배향해야 하는 것처럼, 이곳에 왔으면 남자현 지사에게 절 한 번 올리고 돌아서야 마땅하지 않겠나.

추모각은 열려 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향교와 서원 등 선현을 기리는 곳 중에서 사당을 열어둔 곳은 일찍이 보지 못했다. 굳게 문을 잠궈 두었다. 그러므로 공자와 선비들에게 절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은 처음부터 제한되었다. 이는 곧 일반 대중은 참배하지 말라는 '터무니없는' 자격 제한이다. '자기'들끼리만 날을 정해두고 사당 문을 열어 절을 한다. 그래서야 어찌 선현을 기리는 마음을  대중화할 수 있으리.

문이 잠기어 있더라도 들어갈 방도를 찾을 판에, 열려있는데 아니 들어갈 까닭이 없다. 물론 열린 문은 중문이 아니라 오른쪽 문이다. 무릇 외삼문이든 내삼문이든 중문은 사람이 함부로 드나드는 법이 아니니, 남자현 지사의 추모각도 중문이 닫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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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당 안에서 남자현 지사의 영정 앞에 절을 올리고 있는 답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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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생가, 남이포, 봉감 국보탑, 서석지, 두들마을 등 영양의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을 둘러보고 내려오던 역사문화유산 답사자들이 남자현 지사 생가터를 방문하지 않을 리 없다. 뿐만 아니라, 남자현 지사의 사당에서 중문으로 들어가겠노라 고집을 피울 이도 없다. 이런 제향 시설에서는 으레 중문 출입을 하지 않는다는 것쯤이야 모두들 아는 일이다.

사실은 모두들 "문이 잠겨 있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야!"하고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다. 전국 방방골골을 다녀본 역사여행 답사자라면 한결같이 알고 있는 일이지만, 이렇게 답사자의 배향을 위해 문을 개방해둔 곳은 정말 드물다. 당연히, 남자현 지사의 생가 사당은 문이 열려 있는데 무슨 불만이 있을까.

모두들 들어가 참배를 한다. 문이 닫혀 있을 거라 지레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빈손'이 아니었다. 조금 전에 들른 영농조합에서 자체 생산한 향토 막걸리를 구입했었는데, 그야말로 배향을 하는 데는 딱 안성맞춤이다. 빛깔 좋고, 향기 좋고, 그래서 모두 좋다.

하지만 사진을 찍을 때엔 술을 치우기로 했다. 잔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잔도 없이 지사께 술을 올린다는 것은 정말 미안하고 죄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뜨겁게 세상을 버린 분께 어찌 술잔 하나 갖추지 못한 채 참배를 한단 말인가. 배향은 술병을 얹은 채로 했지만, 사진만은 말끔한 모습이 나오도록 신경을 쓰기로 했다. 이를 두고 누군가가 '지식인의 허위의식'이라 비방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후회하지 않으리라. 

8월 22일, 남자현 지사 타계 80년이 되는 날을 코앞에 두고, 그의 생가와 사당을 찾아  참배하는 이 마음,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다 해도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하늘나라에 계시는 그 분께서 알리라' 자위하면서, 우리는 담담하게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서로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중앙정부에도 보훈처에도, 경상북도에도 영양군에도 묻지 않았다. 아니, 묻지 못했다. 8월 22일, 남자현 지사를 기려 어디에서 누가 무슨 추념을 하는지, 차마 묻지 못했다. 아무도 그녀를 기리지 않는다면 어쩔 것인가. 우리는 그것이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