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적인 국가관을 의심받는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새누리당 박근혜 의원은 6월1일 이런 말을 했다. 통합진보당 이석기·김재연 의원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경선 부정 의혹으로 출발했던 두 의원의 제명 논란은 이 발언을 계기로 ‘국가관 논쟁’으로 급격히 전환됐다.
12일 뒤인 6월12일, ‘퇴각 신호’가 떨어졌다. 홍일표 새누리당 원내대변인은 “이석기·김재연 의원은 당내
부정선거 문제로 제명되어야 한다는 것이지, 국가관이나 사상 문제로 제명하겠다는 게 아니다”라고 브리핑했다. 국가관 논쟁을 계속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강경 보수 인사들이 색깔론 공세를 펼쳐 역풍이 불고, 5·16 쿠데타를 ‘혁명’이라 부른 박근혜 의원의 과거 발언이 회자되는 등, 국가관 논쟁에서 얻을 것이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12일 동안의 헛소동’으로 치부하기에는 예사롭지 않다. 현 시점에서 가장 강력한
대선주자인 박근혜의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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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
정치권에서는 박 의원의 큰 장점으로 ‘메시지
관리능력’을 꼽는 사람이 많다. 핵심 메시지를 정하면, 지겨울 정도로 반복해
각인시킨다. 노무현 정권을 상대로는 ‘경제’를 내세워 각을 세웠다. 간첩 사건이 터져도 결론은 ‘경제’로 났다. 이명박 정권을 상대로는 ‘신뢰’를 대표
브랜드로 삼았다. 경제가 안 좋은 이유도 ‘신뢰’가 무너져서라는 식이었다. 정치 고관여층이 보기에는 ‘수첩공주’ ‘녹음기’ ‘앵무새’ 따위 별명이 어울리는 따분한 방식이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를 밀어붙여 다수 대중에 확실하게 자기 브랜드를 각인시킨다.
중도층 공략하는 메시지, 그러나…지난 4월 총선에서도 박근혜식 메시지 관리는 빛을 발했다. ‘새누리당은 공천을 혁신한 변화 세력이다’ ‘말 바꾸기 세력인 야당을 심판하자’ 단 두 가지 메시지만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전략과 메시지가 지리멸렬했던 야권과는 뚜렷이
대조됐다. 120석도 어려울 것이라던 새누리당이 과반을 확보하는 밑바탕이 됐다.
박근혜식 메시지의 핵심 목표는 중도층 표심 잡기다. 보수층의 확고한 지지를 이미 확보한 박 의원은 철저하게 중도를 공략하는 메시지를 내놓는다. ‘경제’와 ‘신뢰’가 그랬고, 대선에서 내놓을 가치들인 ‘
복지국가’와 ‘
과학기술 기반
성장’ 등이 그렇다.
문제는 ‘준비된 메시지’와 큰 괴리를 보이는 박 의원의 ‘본심’이 불쑥 튀어나올 때다. ‘안철수 열풍’이 불어닥쳤던 지난해 9월, 취재진이 끈질기게 안철수 현상에 대해 묻자 박 의원은 “병 걸리셨어요?”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석 달 전인 6월에는 동생 박지만씨가 저축은행
로비에 개입했다는 의혹에 대해 “본인이 아니라고 했으니 끝난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두 발언 모두 친박계 인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원칙주의’로 포장해온 박근혜 의원의 완고함이 한 발만 삐끗하면
권위주의로 빠질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준비된 메시지’가 잘 정련된 온정적 중도주의 성향을 띤다면, ‘돌발 발언’은 권위적 보수주의 성향이 짙다. 현재 새누리당에서 벌어지는 ‘대선 경선 룰 논란’에서도 박 의원은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이럴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박근혜식 원칙주의인데, 이는 권위주의와 동전의 양면이라는 평이다. 한 수도권 비박계 의원은 “정치는 원칙을 관철하는 일이 아니라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일인데, 경선 룰 논란만 봐도 친박계의 방식은 정치인의 그것이 아니다. 박근혜가 어릴 때부터 훈련받은 것은 정치가 아니라 통치다”라고 말했다.
‘국가관 발언’은 어느 쪽일까. 한 친박계 핵심 인사는 “준비된 메시지는 아닌 것으로 안다. 최소한, 그동안 박근혜 의원의 중도적 메시지를 만들어온 팀의 작품은 아니다. 본인의 돌발 발언이거나, ‘엉뚱한 팀’의 헛발질이거나 둘 중 하나다”라고 말했다. 통합진보당 논란이 새누리당에 유리한 국면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선주자까지 직접 나서서 보수색이 강한 ‘국가관 논쟁’을 주도한 것은 평소의 박근혜 스타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공격 신호’를 받은 새누리당은 앞 다투어 이념 논쟁에 불을 지폈다. 이한구 원내대표는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간첩 출신이 있다”라고 말해 논란을 심화시켰고,
군인 출신인 한기호 의원은 사상 검증이 충분히
가능하다며 “옛날 천주교 신도에게 십자가를 밟고 가게 한 적이 있지 않으냐”라고 말해 여론과 교계의 거센 역풍을 맞았다. 하나같이 박 의원의 대선 가도에 부담이 되는 보수색 짙은 발언들이다. 이는 박근혜 캠프가 그리는 대선 전략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불붙은 ‘충성 경쟁’은 전략적으로 이득이 없는 곳까지 새누리당을 밀어붙여버렸다.
대선 국면에서 돌발 발언 줄일 수 있을까박근혜 의원의 대선 승리 가능성이 구체화할수록, 강경 보수 인사들의 준동도 노골화할 전망이다. 박근혜 의원의 원로 자문그룹으로 알려진 ‘7인회’는 3공·5공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면면 일색이다. 내란죄로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받은 전두환씨가 육사 생도들을 사열했다는 보도로 한껏 달아오른 여론은 “숨죽여 지내던 5공 세력이 이처럼 활개를 치는 데는 원조 3공 격인 ‘박근혜의 득세’에 힘입은 바 크다”라는 쪽으로 논리를 이어가는 분위기다.
이는 다시 중도층의 역풍을 부른다. 보수색이 짙어지면, 중도는 이탈한다. 특히 대선의 향방을 쥔 세대로 평가받는 40대는, 과거사 이슈가 부각될수록 박근혜에게서 멀어질 가능성이 높은 민주화 세대다.
박근혜 본인부터가 자유롭지 않다. 5·16이라는 원조 군사 쿠데타의 유산을 고스란히 승계한 박 의원은, 2007년 당시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서 “5·16은 구국의 혁명이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발언은 두고두고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일상적 국면에서라면, 메시지는 보좌진이 다듬어줄 수 있다. 하지만 대선 국면에 들어서면 후보는 매 순간 본인이 판단해야 하는 시험대에 선다. 돌발 발언의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진다. 박 의원의 ‘권위주의 유전자’가 돌출할
공간이 열리는 셈이다. ‘5·16 혁명’ 발언이 2007년 대선 국면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국가관 발언’으로 촉발된 ‘12일간의 헛소동’은, 대선주자 박근혜가 남은 6개월간 맞닥뜨릴 딜레마의 예고편일지 모른다.